어머니의 멍든 가슴에 한평생 응어리진 사연일까?

[문용주의 생활 명상 24]

삼월 초 어머니 생신 즈음하여 안동에 있는 병원에 다녀왔다. 병환으로 급히 모시다 보니 동생의 인연으로 입원한 곳에 누워 계신 지 벌써 9년째다. 삼 개월 후 혼자 모시던 아버지마저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셔서 함께 입원하셨지만, 재작년에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형제들 모두 이 사실을 함구하고 있어 지금도 모르고 계신다. 아신다 해도 충격받거나 크게 슬퍼하시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여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비록 병실은 달라도 함께 해로(偕老)하셨던 오랜 기억에 한 번쯤은 물어볼 만도 할 텐데 아직도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이번 면회에서도 어머니께 손주들 노는 동영상 외에 동생이 가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하춘하와 남보원의 ‘잘했군 잘했어’ 노래 유튜브를 보여드렸다. 손주 노는 모습에서 과거 나와 동생들을 돌볼 때 기억을 되살리셨을 테고 노래를 들을 때는 젊은 시절 즐겨 듣고 보았던 라디오 TV의 기억을 되살리셨을 것이다. 당시 살면서 느꼈던 애환들이 다시 떠올랐든지 즐거워하셨다. 반면 동백 아가씨 노래 가사로 인해 지금도 병실에만 갇혀 사시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과 겹쳐 마음이 아프고 죄송스러웠다. 비록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계시지만 조그마한 추억의 기회만 있어도 즐거워하시는 것이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같은 연배의 다른 분들처럼 어머니의 삶은, 현대화된 지금의 여성들이 겪는 여자의 일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 부자유에다 가난과 차별의 환경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가면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한 희생과 노력의 한평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내가 남자로서 아들로서 장남으로서 누린 많은 혜택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헌신과 고통의 결과에 불과함을 다시 절실히 느낀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상경하여 떨어져 살았지만, 동생들이 결혼하고 독립하기 전까지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셨을 테니 하나 있는 막내 여동생이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는 하루도 걱정 없이 지낸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60대 후반 일찍부터 병원 입원실을 드나드셨고 지금은 아예 병원이 집이 되어 24시간 생활하신다.  

누구나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가 있듯이 어머니는 이미자가 부르는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외가의 조부모님 시키는 대로 한 결혼 이후 아버지를 따라 경남 산청에서 부산이란 객지에 와서 자리 잡고 살기 위해 한 고생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모두를 먹이고 보살피고 키우면서 멍든 가슴이 화병으로 바뀌어 핏빛처럼 붉은 동백꽃이 되었는지 그 노래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처연해진다. 뼈마디가 잡히는 손에 살이 더 오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잠시 하는 짧은 면회 시간만이라도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고픈 마음뿐이다. 병실 TV에는 더 이상 이미자가 나오지 않기에 대신 유튜브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오랜만에 웃음이 마른 입술을 적시는 것 같다. 요즘 이미자 못지않은 중학생 어린 소녀 가수들의 노래가 있어도 그 시절 그 노래 그 목소리를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해군으로 복무했던 경력이 있었음에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으로 자진 입대하여 전쟁을 치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아버지 얘기를 들으면서 당시 살았던 부모님 세대의 어려움과 마음 앓이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덕분에 고향 근처 잘 가꾸어 놓은 호국원에서 영면하고 계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아직도 뵐 때마다, 거칠고 세찬 바닷바람을 견디면서 해운대 동백섬과 영도 태종대에서 한겨울을 넘기고 피는 붉고 고운 동백꽃처럼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하는 그 사연을 되풀이하시는 것 같다. 

[문용주] 참살림아카데미/참살림수행원 원장, 시산문학작가회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