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함께 ‘친일문학 다시 읽기’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우리 사회의 적폐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친일잔재 청산이 필수적이고, 그 첫걸음은 친일문학의 실체를 대중이 정확히 아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친일문인과 그 작품을 다시 읽음으로써 민족정기가 바로 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대장정에 들어갑니다. (편집자)

[문학뉴스 연중 캠페인- 친일시 다시 읽기 16]

댕기タンギ

주요한

나라의 부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

몸에 지니고 싸우시면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지요

북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밑에 재우겠어요

꿈에 돌아오시는 당신은

원앙침에서 주무시게 하겠어요

아무르의 얼음도 여름에는 녹겠지요

녹았어도 소식이 없는 여름일랑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서강西江 저녁놀의 타는 듯한 붉은 잿빛은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신 당신의 피

무언의 개선, 마을 역 앞에서

하이얀 댕기 드리우고 만세를 외치겠어요

-'국민문학' 1941년 11월호

(주요한 시인 1900∼1979)

해설

1979년 주요한이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자 그해 나라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다. 해방 정국 이후, 우리말 발음의 그의 이름만큼이나 정부 요직을 두루 섭렵했던 결과다. 이는 부일세력에 대한 청산이나 척결이 되지 않은 사회에서 다분히 친일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러 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자유시의 효시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위의 시, 주요한의 ‘불놀이’는 20세 作詩라는 약관의 나이를 믿을 수 없으리만치 원숙한 열정으로 나를 압도했던 것을 기억한다. 전문을 읽다보면 흡사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를 연상케도 했던 작품으로 1919년 주요한이 신시운동을 펼치던 몇몇 지면 중 하나였던 <창조> 창간호에 발표하였던 시다.

평양에서 목회를 하던 주공삼의 8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평양 숭덕 소학교는 그가 국내에서 몸담았던 교육현장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일본 땅에 발을 딛은 그의 학업은 상해 후장대학 입학 전까지 모두 일본 땅에서였다. 대학 졸업 후 <조선문단>, <독립신문> 등에서 ‘송아지’ 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던 '조선의 누이야 아우야', '조국' 등 몇 편의 시는 조선의 독립을 힘껏 외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변절했던 것일까. 그는 왜 변질되었을까.

그의 시 ‘댕기’에서 빨강은 정열을 상징함과 동시에 피를 상징하기도 한다. 전쟁에 나서는 애인에게 혹은 배우자에게 드리는 마음의 혈서는 부적이 될 것이다. 북쪽에서 당도하는 흉흉한 소식에 흔들리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리움에 지친 님은 꿈속에 서로 만나 정을 나누리라. 북방 아무르의 여름에 얼음이 다 녹아도 소식이 없다면 당신은 기어이 총탄을 맞고 가버렸나.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신 님처럼 나도 나라에 몸 바치련다. 붉은 댕기 대신 검은 댕기를 매고 하얀 간호복 입고 힘껏 나라를 위해 헌신하련다. 서강에 타는 저녁놀만 보아도 핏빛은 장렬하게 싸우다 간 내 님의 피! 내 님을 전쟁에 바치고, 돌아올 이 없는 마을 역에서 하얀 댕기 매고 그래도 만세를 외치겠노라.

한국 여인의 정조를 동원하여 쓰인 위의 시 <댕기>는 깊은 수사가 동원되지 않아 쉽게 읽힌다. 어조가 부드럽지만, 그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처절하다. 서두에 표현된 ‘나라의 부름 받고......’라는 구절로 이미 일제를 제 나라로 전제하고 있다. 1938년 만주에 괴뢰정권을 수립한 일본은 관동군으로 하여 북만주지방까지 제압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외몽골과 소련 접경지역에 잦은 분쟁이 일어나던 중 이를 완전히 해결하려고 전면전을 시작한다. 그중 ‘노몬한Nomonhan’ 지역 전투에서 몽골과 러시아가 손을 잡는 바람에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 영향이 갈 정도로 대패하고 만다. 중원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러시아까지 넘보려던 일본은 그래서 북진정책을 서서히 거두고 남진으로 전쟁 시나리오를 다시 쓸 때가 1940년경부터 41년이다.

위의 시 ‘댕기’는 그리하여 대패한 북만주에 간호사도 자원하고 군인도 가야 하고 군복도 짓고 물품조달의 일꾼이 되어 죽을 각오로 헌신하라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북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라는 표현으로 흉흉한 북만주의 소식을 나타내고 아무르의 여름과 얼음을 운운했던 것이다. 징용으로 떠나는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의 아낙도 빨간 댕기를 검은 댕기, 하얀 댕기로 바꾸어 맬지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 하고 결전을 각오하고 있다. 이 결전의 신념이 자신의 모국, 내 핏줄을 지키는 결의가 아니라 내 나라를 짓밟은 점령국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무모한 탐욕에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니 만대를 두고 통탄할 일 아닌가!

여기서 더구나 하이얀 간호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본은 처음에 간호사나 점포의 점원 등이 필요하다고 한반도에서 여자들을 잡아갔다. 간호사는 의사와 결혼할 수도 있고 돈을 벌어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니 현실이 녹록지 않은 여성들이 자원하기도 했다. 이 간호복을 입은 여성은 저들이 말하는 바로 전장의 성노예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결한 딸들에게 기꺼이 정신대로 자원하라는 말 아닌가. 전후 일본 소설 ‘나쓰메 소세키’의 ‘인간의 조건’은 전장의 실체를 얼마나 잘 드러냈던가. 군 위안소에서 군인들을 하루 종일 받고 해 떨어지는 만주 벌판에 줄을 지어 속소(바라크)로 걸어가는 시들 중 여자들의 발걸음에 대한 묘사는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가슴을 옥죄인다.

그 외 ‘성전찬가聖戰讚歌’, ‘최초의 피’ 등 계간 <실천문학>은 2002년 친일문학 작품 명단을 정리·발표한다. 이광수에 이어 둘째로 많았던 주요한의 글 43편은, 44년에 안겨진 제5회 조선예술문학상과 함께 이광수에 버금가는 친일문필가라는 별명을 부여받기에 족한 숫자였다. 일본의 와카(和) 형식을 빌어 쓴 <손에 손을...> 이라고 하는 시집으로 주요한 친일문학의 정점을 찍음으로써다.

1920년대 중반 그가 주요 멤버로 활약하던 <수양동우회>는 당시 이광수가 이끌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의 국내 단체다. 그는 1925년 후장대학을 졸업하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을 주무대로 독립운동에 기여코자 하였으나 이 운동단체를 눈여겨보던 일제가 해산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거부운동에 들어간 150명의 동우회 단원은 1937년 일제히 검거된다. 음악계의 홍난파, 현제명, 문학계의 전영택을 비롯한 여러 문사가 전향 성명을 발표하는 등, 동우회 개개인이 여러 형태로 일제에 협조할 것을 약속하면서 옥사한 2명을 빼고 1941년에 받아낸 무죄 평결이었다.

그런데 위의 사건으로 1937년 6월에 검거된 후 1938년 11월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한 주요한은 이후 국민정신 총동원 연맹과 함께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주력한다. 그해 9월 <조광>에 시조 ‘여객기’ 발표를 시작으로 문필로써 일제에 협력을 시작하는가 하면, 1940년에는 내선일체운동 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보급운동에 참여하는데 이는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일본어로 문명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력회 결성 준비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전쟁 후원을 독려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발표한 시가 ‘댕기’다.

위의 내용처럼 조선신궁에 참배한 후 1938년 12월 그는 수양동우회를 대표하여 현금 4,000원을 국방헌금조로 종로경찰서에 기탁한다. 그해 12월 14일 ‘시국유지원탁회의’ 참석을 시작으로 그의 친일노선은 본격화된다. 징병제 찬양, 미-영타도 궐기대회, 대동아공영권 찬양대회, 학병찬양학교순회강연회 등 강연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친일부역단체의 간부를 섭렵함으로써 어떤 말로도 비켜날 수 없는 친일인사로 못박히고야 만다.

주요한, 그렇다면 해방 이후 그의 행보는 어땠을까. 그는 상공부장관, 부흥부 장관, 대한일보 사장, 동아- 조선일보 편집장, 대한해운공사 대표, 무역진흥공사 사장 등 문화계와 언론, 정재계 요직이란 요직을 두루 맡는다. 일본서기의 국조이념인 <紘一>을 넣어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창씨개명을 했던 인물임이 기억에서 흐려지기도 전에 그는 흥사단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우국지사요 독립투사로 다시 신분을 세탁하고 있다.

1909년, 하얼삔 역에서 제1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괴수들을 총탄으로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어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체포된다. 그에게 도주란 목숨을 구걸하는 비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열을 결코 용납지 못하는 기개세의 풍운아 안중근 의사가 훗날 주요한, 이광수와 같은 친일 지식인을 만났다면 어찌했을까. 전 세계를 한 개의 집으로 만들자는 일본의 국조개념 굉일紘一, 침략국의 무모한 야욕을 획책하는 데 제 민족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고 고무하고 선동하는 갖은 필설을 만났다면 뭐라 했을까.

비열은 더한 비열과 변절을 생산할 뿐이다. 점령국의 공포정치가 두려워서였다면 다음에 오는 평화정국에서는 조용히 지하에 묻혀 있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 ‘餘敵필화사건’으로 경향신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등, 부패한 정권에 맞서 싸운 기록이 있으나 그것으로는 너무도 뚜렷한 친일 흔적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

엊그제 3.1절 행사장에 성조기와 일장기를 들고 나타나 방화와 폭행을 서슴지 않고 소요를 일으킨 태극기부대의 집단행동을 보며 간담이 서늘해진다. 소규모지만 내란이며 매국이다. 가차 없이 색출하여 엄벌에 처할 일이다. 친일청산에 게을리했던 과오가 돌아서서 우리를 다시 겨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적폐의 가장 근원에 친일이 도사리고 있다. 고금을 통해 예술, 더구나 문학은 정의로운 선진적 시대정신의 구현이며 푸른 정신의 푯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자현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작가회 회원,해양소설 <태양의 밀서>시집 <앞치마를 두른 당나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