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말말]

김혜순 (시인)

 

여성시인이 자신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파멸한다. 여성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없이 파멸할 수도, 타락할 수도 있는 은총이다. 이 은총 속에서 그녀는 더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여성의 몸에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죽음에의 무한한 참여, 목적 없는 여행을 무한히 감행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여성시인의 내부에는 머뭇거리고, 비틀거리고, 남장을 한 채 멀어지는 한 여성이 존재하고, 영원 속에서 젖을 먹이는 한 어머니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그 두 존재의 슬픔과 기쁨이 여성시가 가지는 정서다.

- 에세이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22, 1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