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장편소설 『붉은 고래』 연재

[『붉은 고래』 3권 (18)]

 

《브란덴부르크 문》

환상이었을까. 허방을 디딘 듯 두세 발짝 휘청거린 나는 보았다. 내 몸과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로 두 대의 승용차가 느리게 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승용차 두 대는 실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일 초 전의 내 망막에 비친 것은 환상이 아닐 터. 나는 다시 눈에 힘을 모았다.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나의 큰형은. 1964년 3월 일본 오사카에서 만났던 큰형이 나보다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런 바바리코트를 입고서.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 출처=위키백과)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 출처=위키백과)

나폴레옹이 되고 싶어 환장했을지 모르는 어느 멍청한 게르만 왕이 파리의 개선문을 흉내 내서 세웠는데 이를 건방지게 생각한 나폴레옹이 부숴버렸다는 브란덴부르크 문. 그러나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져 있었던 냉전시대의 어느 날에 국경 검문소로 재등장해 분단의 상징물로 주목받다가,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번엔 거꾸로 통일의 상징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브란덴부르크 문. 그 시멘트 반죽을 덕지덕지 처바른 멋대가리 없는 문의 한쪽 기둥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서 서쪽으로 바라보는 누런 바바리코트의 주머니에서 두 손이 나왔다.

“삼촌이 먼저 만나세요.”

시우가 속삭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조카는 경득과 같이 인도에 남고, 나 혼자 슬금슬금 도로를 건너갔다.

“허, 기, 주.”

내가 또박또박 불렀다. 큰형을 빼다 박은 누런 바바리코트의 대여섯 발 앞에서.

“경욱이 삼촌.”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래, 삼촌이다. 나의 큰조카야.”

“경욱이 삼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바쁜 걸음을 옮겨 다짜고짜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그저 품고 있었다. 냄새를 확인하는 짐승처럼.

“저기 같이 왔다. 너의 사촌 동생, 내 작은형의 아들, 허시우.”

“예에. 모두 보고 싶었습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손위 노릇을 하기 위해 먼저 포옹을 푼 나는 기주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이 기다리는 인도로 옮겨갔다. 기주와 시우가 마주 섰다.

“나의 사촌 아우, 허시우.”

“예. 우리 집안의 종손, 기주 형님.”

두 조카가 포옹을 나누었다.

“제가 전화 드린 서경득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경득과 악수한 기주는 그 손으로 오렌지색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다.

“저녁 9시까지 비워뒀다고 했지?”

“예.”

잠깐 조바심을 탔던 내 마음이 구김살 없이 쫙 펴졌다.

“가자. 호텔 우리 방으로 가서 요기하고 이야기 나누고, 저녁은 한식으로 좀 일찍 시작하자. 괜찮겠나?”

내가 기주에게 물었다.

“예. 일없습니다.”

일없다, 이는 문제없다는 뜻이었다.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할 수는 없을까?”

“현재는 혼자 나와 있습니다.”

큰조카가 미소를 지었다. 좀 쓸쓸한 것이었으나, 만나서 처음 보인 웃음이었다. 경득이 먼저 길을 건너 택시를 잡았다. 나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맥주, 포도주, 돼지고기 보쌈, 요구르트, 생수 등 대화를 뒷받침할 음식들을 미리 마련해둔, 오붓하고 밀폐된 곳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그러고 보니 서울이나 평양에서 이산가족이 상봉해도 밀담은 숙소로 옮겨가서 나누던, 쌍방 간의 웃기는 원칙처럼 굳어진 그 순서를 기주와 나, 기주와 시우, 우리 셋도 이산가족 상봉이기 때문에 속절없이 준수하는 꼴이었다.

현대식 빌딩의 호텔 십오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엔 우리 일행 네 사람이 전부였다. 경득이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로 우리 셋을 내려다보며 괄괄하게 떠들었다.

“저는 제 방에서 한숨 푹 자고 나서 세 시간 뒤에나 합류하겠습니다. 그런데 씨 도둑질은 못한다는 우리 속담도 있긴 있습니다만, 어쩌면 세 사람이 그렇게 얼굴 생김새나 분위기도 흡사하고 키도 고만고만하게 비슷할 수 있습니까? 꼭 삼형제 같습니다.”

우리 셋은 눈짓을 나누며 방긋이 웃었다. 나는 우리 셋의 머리칼과 입성을 슬쩍 살폈다. 내 머리칼은 허옇고, 기주의 것은 희끗희끗하고, 시우의 것은 까맣다. 나는 감귤색 바탕에 앵두색 굵은 수직선이 그어진 긴 잠바, 기주는 누런 바바리코트 안에 흰색 와이셔츠와 남색 바탕의 감꽃 무늬 넥타이, 시우는 고동색 셔츠 위에 엉덩이를 덮는 청색 반코트. 나는 설핏 상상을 폈다. 우리 셋이 발가벗고 대중목욕탕에 나타나면 형제로 보아줄 것이라고. 고속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활짝 열렸다.

 

《다시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승윤, 승연.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어둑새벽이다.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일어나 서재의 책상에 앉는다. 새 아침이 와서 너희의 곤한 잠을 깨우기 전에 너희에게 남기는 이 글을 끝맺을 생각이다. 일찍이 작은형의 만년필을 잃어버렸고 큰형의 만년필을 빼앗겼는데, 몹시 지쳤을 이 만년필이 여태껏 말썽을 일으키지 않아서 흡사 형들의 두 만년필이 너그러이 아우의 불찰을 관용해주는 듯하다.

 

호텔 방에서 네 시간, 부슬비 내리는 거리에서 한 시간, 향수를 달래주는 음식들 앞에서 네 시간. 나는 3월 25일 베를린에서 맞은 일요일에 아홉 시간을 기주와 함께 지냈다. 지금은, 하나부터 아홉까지 세기 바쁘게 끝나버리는, 아주 짧은 순간처럼 느껴지지만.

모든 이산가족의 상봉이 그렇듯, 너무나 마땅하게도 호텔 방에서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는 대화부터 나누었다. 기주가 들려준 것을 정리하마.

나의 큰형 허경민은 죽었다. 1983년 3월 병사. 큰형이 아내 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던 것은 1983년 1월이었다. 출옥하는 허경욱을 고향집 어머니 곁으로 태워줬던 사내들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갔던 그때, 나는 최동수 노인한테서 큰형 근황도 얻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몸이 좋지 않아서 아내와 아이들한테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그 자리는 큰형의 죽음을 상상하기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큰형은 간신히 회갑의 턱에 닿아, 막내아우가 감옥을 나오기 바쁘게,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었다. 그나마 병마에 시달리다…….

영웅 칭호를 받아 두 아들에게 당당한 배움의 길을 열어준 나의 큰형수는 요새 평양에 살며, 호호백발 노파를 기주 아우(허기형)의 내외가 모시고 있다. 기형이 조카는 컴퓨터 전문가로 ‘매우 특별한 공장’에서 일한다. 나는 캐묻고 싶었다. 미사일 프로그램이라도 만들고 있느냐고. 하지만 침으로 고인 말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기주는 나의 친동생이라 해도 믿어줄 생김새와 체격이었다. 평양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외국어학부를 거쳐 동베를린에 유학도 했다는, 독일어와 영어에 능통한 외교 일꾼에게 나는 ‘세계와 인류의 미래’ 따위를 고뇌하는 거대 담론을 꺼내지 않았다. 인민을 굶주리게 하는 조국을 가진 외교관이니 묻지 않아도 어깨 펴고 지내기가 어려울 터.

그리고 나는 끝까지 삼갔다. 너의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으니 그렇다지만 아내와 떨어져 지내니 외롭지 않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이걸 왜 참았을까. 달러를 절약해야 하는 나라의 외교관에게 결례일 것 같아서? 아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아들인 ‘위대한 장군님’이 망명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신뢰할 만큼 당성이 투철한 외교관의 귀에 ‘외롭지 않느냐’ 따위의 질문은 모욕으로 들릴 수 있어서? 이 역시 아니었다. 큰조카의 쓸쓸함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었다.

기주가 시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작은아버님의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그러니까 큰조카는 알고 있었다. 나의 작은형이 이른바 ‘문민 정권’의 법정을 거쳐 감옥에 갇혔다 이태 전에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시우가 아버지는 서울에 잘 계신다는 답을 했다. 내가 사정을 간략하게 정리해 더 보탰고.

기주, 시우, 나, 그리고 나의 카메라를 맡은 서경득. 우리 넷은 오후 4시가 넘어 호텔을 나섰다. 부슬비 내리는 거리를 우리는 걷기로 했다. 우산도 없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다시 갔다. 밥과 찌개와 소주가 기다리는, 예약해둔 한국식당으로 가기 전에 통일의 상징물과 더불어 기념사진을 박기 위해. 필름은 두 통을 준비했다. 기주와 나와 시우, 기주과 시우, 기주와 나, 시우와 나, 그리고 경득을 넣어 넷 모두. 이 차례로 각각 두 판씩 찍고 필름을 갈아 끼운 다음, 새 필름에도 똑같은 차례와 똑같은 횟수로 똑같은 포즈를 담았다. 앞의 필름은 기주를 주고, 뒤의 것은 내가 가졌다. 시우와 경득에겐 내가 사진을 빼서 우송해주기로 했는데, 사진들은 벌써 항공기에 태워졌다.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으나 저물 무렵의 부슬비 뿌리는 공간. 내가 가운데 서고 왼쪽에 기주, 오른쪽에 시우가 붙어선 두 장의 사진. 인물이 크게 든 것에는 안 보이지만 인물이 작게 든 것에는 브란덴부르크 문 꼭대기에 올라앉은 사두마차四頭馬車가 고만고만한 우리 셋의 정수리 위에 등장해 있다.

사진을 찍는 현장에서 나는 보았다. 마차를 이끄는 네 마리의 말들이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랬다.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통일의 상징물은 맨 꼭대기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독 진영에서 동독 진영으로 늠름하게 진군해 들어가는 사두마차를 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심술을 싣고 있을까. 일찍부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해 나아가는 시대를 예언하고 있었던 그 마차는.

기념촬영을 마치자 기주가 새삼 나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당부했다.

“막내삼촌과 같은 경험이 소중한 민족적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체제로 통일국가를 이뤄야 하는지, 또 어떤 인간형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해야 하는지. 이건 막내삼촌이 남은 인생을 다 바쳐 선두로 연구하셔야 하는 과업입니다.”

나는 그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한 형제로 어우러진 우리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달려가는 사두마차. 그 사진을 이 노트에 붙여 놓으랴?

‘누가 마차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을까?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마차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다면 그 안에 실린 내용물이라도 가다듬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솟는다.

내가 마부석에 올라앉을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인생을 바쳐 헤치고 나온 고난의 연대기는 마차 안에 실어야 하는 재산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역정이 시우가 들려준 ‘인듀어런스’는 아닐지라도…….

두어 차례 한숨을 쉬고 나니, 나는 넉넉해지는구나. 시우, 승윤과 승연, 그리고 기주가 펼쳐놓은 브란덴부르크 문 사진에서 손가락으로 나를 콕 찍으며 ‘작은할아버지’라고 부를 녀석들이 있으니……. 부디 그 녀석들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우리 넷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등지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하나님의 초상’이란 제목을 붙여준 ‘불탄 교회’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는 부슬비에 젖은 어둠이 옅은 먹물처럼 퍼지고 있었다. 가로등과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이, 저무는 허공의 빗줄기를 너덜너덜 비추었으나 아무도 젖은 머리칼과 겉옷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서경득이 예약해둔 한국식당은 이층에 있었다. 거리가 내다보이는 모서리의 네모반듯한 방은 포근하고 아담했다. 고맙게도 김치 냄새를 풍기는 벽에 저 저명한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보니 밀레의 저 그림은 벌써 옛날에 까마득한 역사의 기록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젓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킨 서경득의 이 말을 내가 받았다.

“맞아. 아이들이 소를 먹이고 황소가 논을 갈고 소달구지가 한가롭게 들길을 가는 풍경도 이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닮아 버렸잖아.”

나의 보충을 기주가 받았다.

“그건 남쪽의 사정입니다. 아직 북쪽에선 생활로 남아 있습니다.”

곧바로 경쾌한 웃음이 터졌다. 기주의 표정과 말씨가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기에.

멀리 팔려온 소주가 등장했다. 하지만 술잔을 자주 못 잡게 만드는 긴 대화가 이어졌다. 몇 부분만 옮겨놓는다.

“혹시 작은아버님과 막내삼촌은 많이 다투지 않았습니까?”

허경윤과 허경욱, 우리 형제의 관계를 기주가 궁금해했다.

“우선에, 작은형과 나는 함께 생활할 시간이 없었다. 작은형이 육사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됐지만, 내가 집을 떠난 뒤로는 완전히 그렇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나갔다가 마흔 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때 작은형은 또 미국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십 년 가까이 지나서 작은형이 귀국하긴 했는데, 작은형은 서울에 살았고 나는 포항에 살았고……. 새로 정치를 시작한 작은형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나도 선거운동을 도울 기회는 얻었지만, 역시 형제가 함께할 시간은 없었다. 또 몇 년 뒤에는 작은형이 법정에 서게 되었으니……. 우리 형제는 아직 한 번도 조국이나 민족, 세계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 서로의 세계관을 내놓고 견주어본 일이 없었다. 앞으로 그런 시간이 오겠나? 만약 온다면, 그때는 기주와 시우도 그 자리에 함께 앉아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안 되면 별 의미도 없는 거지. 작은형이나 나나, 우리 세대는 극단적인 경험이 강했으니, 많이 시끄럽겠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둘러앉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큰형이 살아 계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제 어쩌겠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퇴각하는 겨울의 거의 마지막 한파가 덮치고 있었어요. 자리에 누우셔서 임종하신 순간에 당신은 이불 대신 무엇을 덮고 계셨는지 아십니까? 아버지가 원해서 그렇게 해드렸던 건데, 막내삼촌이 평양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전해주신 겨울 외투를 덮고 운명하셨습니다. 유언에도 막내삼촌이 들어 있었어요. 기주, 기형이는 나중에 꼭 경욱이 삼촌을 만나야 한다고. 만나서 당신이 몹시 미안해했다는 말을 꼭 전해줘야 한다고……. 그러니까 아버지는 서울의 작은아버지가 정치적 전면에 나서 계신 걸 알고부터 언젠가는 막내삼촌이 무기징역을 벗고 석방될 것으로 기대는 하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도 막내삼촌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고 계셨던 겁니다. 무엇보다도 막내삼촌의 무기징역, 그게 아버지를 병들게 했다고, 아버지 떠나신 뒤에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막내삼촌의 자형 되는 분에 대한 말씀도 하셨어요. 그 친구한테도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고.”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맺혔다. 나의 눈에도, 기주의 눈에도, 시우의 눈에도. 우리 셋은 아버지의 빈소에 모인 형제처럼 홀짝홀짝 울었다.

“큰형은 그만하면 됐다. 너무 아까운 나이였지만, 아내와 자식들의 품에서 눈을 감았으니.”

“막내삼촌도 더불어 계셨지요. 제가 입다가 동생에게 물려줬고, 동생이 입다가 집에 둔 것을 어머니가 잘 간수했던 겁니다. 막내삼촌의 외투를 덮고 눈을 감으셨으니, 막내삼촌도 같이 계셨던 거지요.”

“그래……. 언젠가 큰형 무덤에라도 갈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내가 큰형의 친구요 나의 자형이요 조카들의 고모부인 그분의 이 말씀을 전해 드릴 거다. 그분은 간간이 이런 말씀을 하셔. ‘우리 장인, 장모는 아들 셋 길러서 우리 민족에 참 공평하게 나눠주신 분들이야. 맏이는 김일성 주고, 중간은 박정희 주고, 막내는 저기도 주고 여기도 줬으니.’ 이 말씀을…….”

“예에.”

기주가 길게 한숨을 불었다.

“자형의 그 말씀을 큰형이 전해 들으면, ‘역시 그 친구는’ 하고 호탕하게 웃으실 거다.”

“고모부께 아직 큰절 한번 못 올렸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시우가 휴지로 콧물을 훔쳤다.

“기주야. 중국에 사는 큰고모 아나?”

“시집가서 곧 압록강 건너갔다는 말씀을 아버님한테 듣긴 했습니다만.”

“하얼빈 계셔. 작은형이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였으니까 1993년 봄이었다. 막내로 둔 외아들 내외하고 같이 고향에 한 번 다녀가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큰 회한을 하나 더 풀어드린 행차였지. 이젠 거의 거동이 불편한 몸이라고 하네.”

“상이 나더라도 저는 가지 못할 것 같군요.”

기주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건 내가 가봐야지. 하얼빈도 가볼까 하고 있는데, 그 외아들의 맏이 녀석을 한국으로 초청할 계획이다. 어디든 취직을 시키는 게 좋겠지. 하다못해 우리 과수원에 데리고 있더라도 삶의 기반을 마련해줄까 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그래요. 삼촌.”

기주와 시우가 똑같이 반색을 했다.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눈물을 거두기 위해.

“기주는 술은 좀 하나?”

“술요? 외교관은 상황 판단이 빨라야 하고 격식에도 이골이 나야 하지만 술도 세야 합니다. 아마 요새 남조선 대표들과 회담하러 나가는 위치에 있다면 폭탄주 연습부터 했을 겁니다.”

기주의 대답에 나는 풋풋하게 웃었다. 물기가 덜 마른 눈으로 시우가 기주를 쳐다보았다.

“형님은 해외여행을 자주 하셨겠습니다.”

“여행과 공무는 딴판이야. 공무로 가면 여행 맛이 가셔져. 공무로는 모스크바나 이쪽 동유럽으로 자주 나왔지만, 여행할 여가는 없었어. 동생은 미국에서 성장했고 지금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니까 여행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아도 되겠고, 막내삼촌은 어땠습니까?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셨으니, 갚아주는 뜻에서도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으시고요?”

“해외여행이라……. 1964년 봄이었으니까 이십대 초반인데, 그때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갔던 게 해외여행의 전부였다. 1983년 1월에 잠시 일본 갔을 때는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나 했으니 그건 아예 여행도 아니었고, 북으로 들어갔던 것은 조국의 일부에 다녀온 거니까 결코 해외여행은 못 되는 거고.”

“일본으로 밀항, 그건 여행이 아니라 가출이라고 해야 더 옳지 않습니까?”

기주의 맑게 씻긴 동공에 살짝 장난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것이 반가웠다.

“그게 왜 가출이야?”

“부모님 허락받지 않고 장기간 집을 나가면 그걸 가출이라 하지 않습니까? 절로 들어가면 출가가 되는 것이고요 .”

“그렇네요. 형님 말씀이 맞아요. 삼촌은 그때 몰래 집을 나와 일본으로 들어갔으니까 그건 해외여행이 아니라 가출이었네요.”

시우가 기주 편을 들었다. 듣고 보니 어긋난 소리가 아니어서 내가 수정을 했다.

“가출이었다 하더라도 1964년에 외국 땅을 한 번 밟았던 거니까, 그때 이후로 따지면 이번이 37년 만의 첫 해외여행이 되는 셈이다.”

“바쁜 일이 많으셨어요? 견문을 넓혀야 유연해질 수 있는데, 막내삼촌은 해외여행에 너무 인색하셨습니다.”

내 얼굴에 넉넉한 웃음이 피었다. 기주와 만난 자리에선 처음이었다. 견문을 넓혀야 유연해질 수 있다는 말, 그냥 대수롭잖게 던진 그것이 전광석화 같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 위안과 안도의 나비로 사뿐사뿐 내 가슴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수고스럽게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주세희가 전화로 일어판 서준식 『옥중서간집』의 서문을 빌어 일러줬던 그 충고를.

“인색했던 건 아니고, 나갈 수가 없었어.”

“왜요? 경제적 문제였나요?”

“아니. 공직선거 후보로 나설 권리까지 법적으로 완전히 회복한 것이 올해 1월부터였으니까, 내가 외국에 나다니기에는 여러 가지로 까다로웠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당국의 허가를 받기 어려워서 못 나가시다가 이제 겨우 당국의 허가가 떨어져서 나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꼭 그런 셈이다.”

“그러면 이건 여행을 나오신 게 아니지요. 남에선 군대나 학교에서 허가를 받아 밖으로 나오는 것을 외출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막내삼촌은 37년 만에 외출을 하신 겁니다.”

“와, 형님!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삼촌은 37년 만의 외출입니다.”

시우가 함성과 박수로 기주의 논리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나는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37년 만의 외출, 좋다!”

내가 흔쾌히 동의했다.

 

함성과 박수와 웃음. 이것이 술잔을 돌리는 힘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소주 석 잔을 거푸 삼켰다. 그래도 술병은 쉴 틈이 없었다. 십여 분 만에 빈 병이 셋 나왔다. 소주의 힘을 빌려 저마다 깊은 속에 가둬둔 이별의 무게를 들키지 않으려 했는지 몰랐다. 시우의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기주의 안색은 창백하게 바랬다. 둘 다 눈빛은 말똥말똥했다. 나는 판단했다. 성가신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을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나의 차분한 시선이 먼저 시우의 눈에 닿았다.

“시우야. 내일이면 너하고도 헤어져야 한다. 나의 평생에 너하고는 첫 작별이다. 몇 년 전 포항의 선거사무실에서 스치는 것과 다름없이 만난 적 있었고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는데, 서른이 다 된 조카와 회갑이 다 된 작은아버지, 우리의 이 관계와 나이를 감안한다면 그때 그것은 만남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이 우리의 첫 만남이고 내일은 첫 작별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시우야. 우리나라에는 오랜만에 만난 손아래에게 손위가 용돈을 주는 풍습이 있다. 내 인생에서 너에게 처음 주는 용돈을 거부하겠나?”

“아닙니다. 삼촌의 따뜻한 마음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받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는 똑같은 시선을 기주의 낯으로 옮겼다. 눈을 살짝 내리깐 그는 얼른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기주야. 너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너에게 처음 주는 용돈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용돈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삼촌 노릇을 거부하겠나?”

큰조카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꿈틀거렸다.

“아닙니다. 저도 조선 사람입니다. 장차 더 늙으신 막내삼촌을 다시 뵙게 되면, 그때는 제가 용돈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정말 고맙다.”

주세희의 봉투에서 메모만 빼낸 그대로를 나는 기주에게 건넸다. 큰조카는 얌전히 받아서 그대로 갈색 콤비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참 말끔해 보였다.

기주도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가족사진 석 장이 들어 있었다. 기주와 그의 아내와 아들 하나와 딸 하나. 기형과 그의 아내와 딸 둘. 초췌한 큰형과 깡마른 큰형수와 기주와 기형. 사진 뒷면엔 이름들이 적혀 있었고…….

끈덕지게 말을 아끼며 거의 내내 침묵을 지켜온 서경득이 모처럼 입을 열어 폭탄주를 마시자고 했다. 허경욱의 37년 만의 외출과 우리의 너무 짧은 만남을 기념하자는 명분을 붙여서. 큰조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거 한번 마셔봅시다.”

그래서 곧바로 폭탄주 세 바퀴가 돌았다. 독일 맥주 속에다 남한 소주를 탄 폭탄주.

경득이 또 제안을 했다.

“부슬비에 젖은 베를린의 거리처럼 향수에 젖고 회한에 젖은 조선 겨레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르지 않는다면, 음주가무의 민족적 정서에 대한 배반입니다.”

시우가 박수를 쳤다. 경득은 아예 방식도 정했다. 차례로 돌아가며 독창을 뽑자고, 합창을 하면 쫓겨나니까 고요한 독창으로 하자고.

“막내삼촌. 그 사람이 가장 아끼는 노래는 그 사람의 숨길 수 없는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기주의 말에 시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다. 한 곡씩 해서 두 바퀴만 돌자.”

내가 손으로 가볍게 식탁을 세 번 쳤다. 노래만이 우리를 기약 없는 이별의 출발선 위에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우부터 ‘오른쪽’으로 돌기로 했다. 시우, 기주, 나, 경득의 차례였다. 시우가 영어로 「메기의 추억」을 부르고 있을 때, 나는 슬쩍 그 옆의 기주를 훔쳐보았다. 미국에서 성장한 사촌동생이 영어로 부르는 노래 앞에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순간, 나는 뭉클했다. 큰조카가 생애에 최초로 만난 사촌동생의 영혼을 진지하게 만나려 하고 있었으니. 노래를 마치는 시우의 볼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다음은 내 앞에 앉은 기주 차례였다. 숨을 깊이 들이쉰 큰조카가 막내삼촌에게 물었다.

“저의 고향은 어디라고 해야 합니까?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거기가 저의 고향입니까?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원산이 저의 고향입니까?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평양도 고향은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의 고향을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한반도 동해 남단의 포항 어디, 영일만이라는 바닷가의 그 어디를 저의 진정한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부탁을 하셨습니다. 통일이 되면, 고향의 ‘죽천’이란 바닷가 언덕에다 다시 묻어달라고……. 몸이 병약해져 식구들 곁으로 찾아오신 아버지는 고향 생각이 나면 혼자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아주 낮게, 아주 조용조용하게 불렀습니다.”

저음으로 착 깔리는 기주의 노래가 베를린의 저문 거리를 적시는 부슬비처럼 나의 영혼을 적셨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아우와의 긴 이별을 앞둔 일본 돗토리 해변의 모래언덕에서 바로 그 노래를 부르던 큰형의 쓸쓸한 모습이 문득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니었다. 나는 큰형과 함께 앉아 있었다. 푸른 청춘의 내가 만났을 때보다 한참 더 늙은 큰형의 노래를 허경욱은 회갑에 거의 이르러 부슬비 내리는 베를린 한 귀퉁이에서 고스란히 다시 듣고 있었다. 뜨거운 눈을 감은 채, 애수가 감도는 아련한 꿈결에 머무는 듯이. (끝)

 

이대환 작가의 장편소설 『붉은 고래』 (전3권)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