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소설집 <에디 혹은 애슐리>...현실과 환상 넘나드는 이야기들

세계, 용기, 욕망, 젠더…분방한 상상력으로 다채롭게 그려내

"묶어놓으니 선명히 보이더군요. 현실의 중력과 상상력의 부력 사이에서 분열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 …벼르고 별렀던 여행을 떠나와 바다에 몸을 담그고 태양에 까맣게 그을리는 나날이 이어지니 두려움이 땀구멍으로 많이 빠져나간 듯합니다. 일종의 삼투압 현상처럼 바다의 파란 기운이 제 안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용기. 지난 몇 년 간 가장 절실했던 단어는 용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활달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가 김성중. 그는 세 번째 소설집을 펴내면서 "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두 번째 질풍노도의 시기가 들이닥쳤다"면서 "지난 몇 년 간 가장 절실했던 단어는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고 밝혔다. 사진=창비 제공)

소설가 김성중(45)이 중미 코스타리카 니코야반도 끝으로 날아가 태평양가에서 보내온 '작가의 말'이다. 터키, 이집트, 남미 같은 곳으로 장거리 여행을 다녔던 그는 여름이면 한 달 정도 집이 아닌 곳에서 지내다 온다는데, 이번에는 지난 5년 동안 써온 단편을 모은 세 번째 소설집 <에디 혹은 애슐리>(창비) 원고를 넘기고 멀고 한적한 바닷가로 날아간 모양이다. 그의 말처럼 이번 소설집에는 ‘현실의 중력과 상상력의 부력’ 사이에서 전개되는 8편의 단편이 포진했다.

자유롭게 떠나고 돌아오는 기질처럼 그의 상상력도 활달하다. 환상과 현실 사이를 가볍게 넘나들며 이야기의 고삐를 능란하게 풀고 죈다. 배경이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소설과 자유롭게 환상과 몽상 속을 누비는 작품들이 반반인데, 기실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은 모두 현실에 뿌리를 내린 내용들이다. 환상과 몽상은 현실을 에둘러 읽어내는 도구인 셈이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축으로 꿰어지진 않는다. 다채롭고 분방하다.

페드로와 레오니는 칠레에 사는 여섯 살짜리 쌍둥이 남매. 이들의 가족은 5년에 한 번씩 전 세계에 흩어진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난다. 첫머리에 배치한 '레오니'는 아프리카를 제외한 사 대륙에 흩어져 있다가 모이는 증조할머니의 자식들이 가족행사를 벌이는 이야기다. 그들은 "살던 나라에서 다시 청소부, 택시기사, 가정부로 돌아간다 해도 할머니의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순간에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한다.

자화자찬이 끝나면 비밀들도 불려나온다. 외국인 아내와 곧 헤어진다거나, 언제까지 육체노동을 할지 모른다는 한숨, 애들이 마약을 해서 아무래도 필리핀으로 돌아와야겠다는 걱정을 하며 '누구는 울고, 누구는 대신 화를 내주고, 누구는 자기가 있는 나라로 오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칠레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레오니가 본 부모의 표정은 '불이 꺼진 밤비행기' 같았다. '몇만 피트의 상공에 떠있지만 아무도 거기에 있는 줄 모르는 밤 비행기'는 고단한 이민자의 삶을 닮았다. 레오니는 "마닐라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은 증조할머니에게 '세계'라는 말은 '내 새끼들 살고 있는 곳'쯤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거니와, 거창하게 강조하지 않아도 따스한 인류애가 절로 스며드는 적절한 비유인 셈이다.

현실의 경계에 발을 걸친 '레오니'를 통과하면 백 년 동안 시간이 멈추는 SF판타지 '에디 혹은 애슐리'가 기다린다. 열두 살 때부터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에디는 외로운 청소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십대 트랜스젠더다.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에디에게 독거노인용으로 만들어졌지만 자폐증이나 우울증 환자에게도 보급되는 로봇 '엔도'가 온다. 불면증 환자와 잠이 없는 로봇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백 년 동안 늙거나 죽는 일이 유예되는 시간이 설정되고, 이 기간 동안 에디는 다양한 성 정체성 사이를 오간다. 소멸을 원한 로봇이 에디에게 전한 말. "당신의 진정한 내면을 발견했다면 슈트는 별 상관이 없지 않나요? 당신이 어떤 젠더를 가졌느냐보다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가 중요하니까요."

'나무추격자 돈 사파테로의 모험'에 이르면 판타지는 더 고조된다. 완벽한 아내 '메리 루'가 삼 년을 같이 살다가 급성신장괴혈증에 걸려 두 달 만에 땅속으로 사라지자, '돈 사파테로'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깊은 슬픔에 빠져든다. 그나마 애지중지하던 아내의 사진을 나무가 훔쳐서 달아난다. '돌아다니는 나무'를 추적하다가, 아내가 심겨 있다는 작은 화분을 받아들고 현실로 돌아오는데 지시를 어기고 기어이 화분에 손가락을 넣어 아내의 씨앗을 확인하다 도로 빼앗기고 만다. 아내의 몸은 연두색 깃털에 덮인 죽은 새가 되었다. 그제야 그는 운다. '나무추격자'는 이제 눈물을 얻어, 외로움을 껴안고 고통받던 시간이 끝났다. 진정한 애도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다.

'배꼽 입술, 무는 이빨'에서 악다구니를 배설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자신의 것인데,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배꼽이 마음대로 내는 소리다. '발설하는 말이, 감정이, 진심이 너무 많다보니 이따금 나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 줄줄 새는 느슨한 그물처럼 느껴졌다. 육체는 사방으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틈새로 온갖 말들이 흘러나왔다.' 살을 씹고 남편이 참아주는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물어뜯는 버릇도 생겨났다. 급기야 별의 연한 살을 깨물고, 별에서 입을 뗀 순간 이빨이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영원히 빨려들어간다. 세상의 욕망을 유체이탈하여 내려다보는 듯한 이야기다. 배꼽의 말과 입이 내는 소리가 다르고, 애착이 그로테스크한 욕망으로 변질돼 우주로 흩어지는 판타지다.

'마젤'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판타지로 꼽을 만하다. '오즈의 마법사'와 '라푼젤'과 '빨간 모자'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를 연주한다. 여인은 신혼여행을 왔다가 폭력 남편 곁을 떠나 공상으로 달아난다. 꿈속에서 라푼젤이 갇힌 탑에 올라가 함께 그곳을 탈출하다가 도로시와 토토, 입술이 잘린 빨간 모자, 희망과 절망을 각각 등에 진 곱추 마젤과 슐리마젤과 합류한다. 그들은 구덩이에 떨어지는데 그곳을 탈출하는 방법을 (절망을 등에 진) 슐리마젤이 제안한다. 마녀에게 가서 지정한 카드만 가져오라고, 대신 오는 동안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여인은 끝내 돌아오라는 남편의 호통에 뒤돌아보고 만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맘속에 보류, 유예, 약해지고 싶은 욕망, 결정권을 넘겨버리고 지시에 따르는 쪽으로 기울고 마는, 큰 목소리에 용해되고 싶은 욕망이, 번번이 그녀를 망쳐버린 욕망이 작동해버린 것이다.'

"번번이 폭군의 손에 놀아난 것은 모두 이 욕망 때문이었다. 그녀의 나약함이 폭군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그치지 않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언제나 폭군만을 탓하면서 하염없이 우는 것, 기억을 해석하기보다 삭제하는 것이 약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무의식중에 믿어왔다. 마젤의 속이 텅 빈 까닭은 그녀가 항상 마젤(희망)보다 슐리마젤(절망)에게 먹이를 주며 키워왔기 때문이리라."

(김성중은 "소설은 나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이라며 "그런 인식은 차가운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압도당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고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사진=창비 제공)

현대문학상을 안겨준 '상속'은 김성중의 글쓰기에 대한 시각과 열망을 함축한 단편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기주 언니와 일찍 죽은 글쓰기 선생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자신의 작가론을 펼친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은 세상을 읽는 일이고, 그 내용을 번역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들을 가르친 요절한 선생은 말했다. "소설은 일종의 번역입니다. 나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 그런 인식은 차가운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완전히 압도당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우리에겐 격렬함이 필요해요. 플롯이니 문장이니 하는 건 집어치우고 이것부터 시작하자고요. 한 번이라도 이 뜨거움에 데이는 게 목표입니다."

몽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활달하게 구사하는 김성중은 쓰다가 좌절한 이야기 부스러기들도 저마다 빛을 간직한 소중한 편린들이라고 쓴다. 꿈속에서 그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소설의 잔해들을 만났다. 그것들은 '모래보다 작고 반딧불보다 약한 빛의 입자'로 대지 위에 '빛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종이를 찾아 꿈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종이 위에 완성될 우주선이 기다린다.

"여전히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제 앞에는 설계도가 여러 장 있답니다. 당장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는 어쩌지 못하면서 화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에는 곧장 올라타는 식이죠. …언젠가 제 우주선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