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기의 유역문예]

(임우기 문학평론가)

김수영의 유고시 <풀>(1968)은 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귀신의 작용 곧 무위이화의 풍경을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발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 (1968. 5. 29. 탈고)

이 시 1연은 의식적이든 집단무의식적이든 그 심연의 구조를 보면, 단군신화의 주요 서사와 상사성相似性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비구름을 몰아 오는 동풍’에는 풍백 우사 운사와 더불어 생명의 봄기운이 잉태되고 땅 위에 펴져서 생명 탄생의 울음을 알립니다. 천지인 삼재와 고난 속의 인간 수련과 수행의 메타포는 이어집니다.

김수영 시 <풀>에 대한 유역문예론 관점에서의 비평은 졸고 <무 혹은 초월자로서의 시인>(2008), <<현대문학>> 8월호 및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에 수록한 만큼 이 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 시에서도 시인으로서의 자기 수련修練과 함께 마침내 무위이화의 시 정신을 드러내는 김수영의 시적 기술은 특히 ‘주문의 형식이 은폐된 시어의 반복’에서 드러납니다.

시어의 반복법은 대부분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용되는 시적 기교이기 십상인데 김수영의 시에서 반복법은 의미를 지우고 개념을 초월하는 주문의 형식이 됩니다. 이 <풀>이라는 시가 대표적인데, 이 시의 첫 연에서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에서 마직막 시행 풀뿌리가 눕는다까지 천지간 생명계의 조화를 통관한 인신적 존재로서 무적 존재는 주문에 능통합니다. 여기서 샤먼(巫)의 언어인 주문이 심연에서 작용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천지간 귀신의 조화를 살피고 이 무위이화의 덕에 합일하는 시적 화자(페르소나) 이면에 은폐된 존재가 ‘하늘’을 우러르는 인신인 무입니다. 그러니까 그간 시 3연에 나오는 풀밭에 서 있는 “발끝에서 발목까지”의 주인공을 ‘(외세와 맞선) 주체적 의식인’ ‘근대적 자유인’으로 해석해왔는데, 유역문예론의 관점에서는 천지인 삼재의 인신적 존재 곧 무당적 존재라고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의 기교로서 주문의 형식을 보면, 김수영의 시 <꽃잎·2>에서 나오는 시어의 반복을 통해 음양의 기운이 조화하기를 주원呪願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비평문이 발표되자 문학과지성 계열의 중견 평론가를 위시하여 많은 비평가들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들었어요. <풀>의 내적 구조를 단군신화의 의식 구조와 비교하고 서로 친교한다고 하니까, 여러 비평가들이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었어요.

비평계가 온통 후기 구조주의 비평이론이나 라캉이니, 서구 현대이론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 이런 평문을 발표하였으니, 반응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죠. 이 땅의 문학비평이 소위 진보연하는 비평가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구도에서 의식이 갇혀있고 대학에서 교수를 겸하는 비평가들은 후기구조주의 비평이론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해요. 아직 이 땅의 비평계가 사대주의 식민상태에 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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