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기의 유역문예]

(임우기 문학평론가)

유역문예론으로 본 김수영의 시 ⓷

하이데거M. Heidegger는 1950년 10월 7일에 발표한 강연문에서 독일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 <어느 겨울 저녁> 한편을 깊이 분석하며 자신의 존재론적 언어관을 설파했어요.

이 존재론적 분석 글에서 하이데거는 “詩Gedicht가 엄청난 지복 속에 성취되었을 경우, 시인의 개성과 이름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언어」, 신상희 역)고 했습니다. 이 말을 존재론적 존재의 맥락에서 읽어야 이 말의 연원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언어의 개념이나 언어의 표상 관념에 매몰되면 시간은 물리적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표상관념을 깨고 그 안에 깃든 언어의 존재로서의 원시적 별빛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것은 언어의 눈짓이요 손짓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시는 적어도 김수영 시는 어떤 심상이나 상상력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김수영의 시는 “언어가 스스로 말한다”는 것이고, 이 말은 천지 만물이 저절로 말을 걸어오는 한에서, 즉 존재의 언어가 말을 걸어오는 한에서, 이에 상응하여 시인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시가 앎이나 의식, 이론이나 이념에 속박되길 거부하고, 혹은 이념을 따르더라도 시를 이념에서 떨어진 채로 시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시는 ‘존재’하고 시인조차 시를 ‘외경’하게 된다는 것이죠.

귀신의 조화에 따르는 시 곧 무위이화에 따르는 시가 그렇습니다. 귀신의 조화가 시어 안에 부려놓은 시적 정기精氣의 존재감이 시를 외경하게 하는 것입니다.

(김수영연구회, <김수영에서 김수영으로>, 솔, 2022)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김수영 시인의 반시론은 의식과 지식, 인식론과 이론적 사유 ‘너머에서 작용하는’ 초월성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각성하고 언어로서 체현하는 것입니다. ‘반시’는 시에 숨겨진 존재 가능성인 것이죠.

실제로 「반시론」에서 글의 맨 끝에 적힌 “반시론의 반어”라는 말 외에, ‘반시’란 언어는 전혀 은폐되어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시’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시’의 은폐된 존재를 찾아내야 하는데, 감추어진 ‘반시’ 개념을 이해하는 첫 단서는, 김수영이 하이데거의 유명한 「릴케론」을 “거의 안 보고 외울 만큼 샅샅이 진단해 보았다.”고 언급한 후, “여기서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텐데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뚫고 나가고 난 뒤보다는 뚫고 나가기 전이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다.”라고 독후감을 피력하는 대목에서 어렴풋이나마 어림됩니다.

우선, 김수영이 하이데거의 자신의 존재론적 시론인 「릴케론」에 깊이 침잠해 있다는 고백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반시’ 개념과 존재론적 사유와의 깊은 연관성은 충분히 짐작됩니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이 하이데거의 「릴케론」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인데, 「반시론」에서 보듯이 김수영은 자신이 처한 존재론적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론을 썼고, 자기 시를 ‘반시’로 이해했다는 점. 김수영이 시적 존재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하이데거였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시론인 「릴케론」을 통해 그 자신의 존재론을 새로이 각성하고 자신의 고유한 시론인 「반시론」을 쓸 수 있었던 것이죠.

귀신론으로 환언하면 시인이 자기 시를 의식하지 않고 ‘저절로 그러함’의 시 쓰기에 이르는, 무위이화의 시 쓰기가 김수영의 시론인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이전에 음양오행과 역의 귀신, 곧 음양의 조화, 무위이화의 체득이 김수영 시 정신에서 기본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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