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기의 유역문예]

(임우기 문학평론가)

유역문예론으로 본 김수영의 시 - 2

아무리 해도, 자기의 몸을 자기가 못 보듯이 자기의 시는 자기가 모른다. 다만 초연할 수는 있다. 너그럽게 보는 것은 과신과도 다르고 자학과도 다르다. 그렇게 너그럽게 자기의 시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도 좋다. 이런 너그러움은 시를 못 쓰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새로운 시를 개척해 나가는 무한한 보고(寶庫)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중략)

그것은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외경에 찬 세계이다. 그러나 나는 프티 부르주아적인 성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 그리고 여전히 부삽질을 하면서 이것이 농부의 흉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농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삽질을 한다. 진짜 농부는 부삽질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의 노동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그는 그의 노동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 김수영, 「반시론」 중. (밑줄 강조 필자)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은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詩여 침을 뱉어라」(강조 필자)

「반시론」에서, 김수영은 ‘반시’가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전혀 설명하지 않음에도 ‘반시론’이라는 제목을 단 사실 그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이는 ‘반시’가 지닌 참된 의미를 은폐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시는 시의 화자 안에 은폐된 존재의 작용이라는 것이죠.

중요한 점은 이 시적 존재의 은폐성 속에 시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존재자 속에 은폐된 존재의 진실을 탈은폐하는 것이 시인 것이지요. 김수영의 육성으로 듣자면, “반시론의 반어”가 시적 존재를 드러내는 길이기 때문에 ‘반시’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 인용한 <반시론>을 귀신론으로 이해하면, “그는(농부는) 자기의 노동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그는 그의 노동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시는 무위이화로서 낳는다는 말과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주요 시론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도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라고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시에서 무위이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셈인데,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위이화에 이르는 시인의 자기 수행, 수심정기입니다. 그래서 김수영의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시’는 절차탁마, 수행 곧 수심정기를 거친 시와 동의어입니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2022)

김수영의 걸출한 시론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인은)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라는 말이 핵심인데,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는 경지”는 다름 아닌 견고한 수행, 수심정기의 경지거든요. 시인은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한 수준에 이르렀으니까, 비로소 무위이화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무위이화의 경지는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독자 자신이 삶 속에서 언어에, 또는 시에 정통한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무위이화의 경지를 이해하고 그 경지에 들 수 있게 됩니다.

시인과 독자만이 아닙니다. 시 자체도 무위이화의 덕에 합치하게 되면 시 자체가 하나의 생명의 기체氣體로서 ‘무위이화’ 차원의 존재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시인조차 시를 외경畏敬하게 된다”는 차원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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