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심재휘의 신작시집은 낮은 목소리로 진심의 온기를 담고 있다)

[문학뉴스=백승 기자] 깊은 밤, 갓전등 불빛 아래에서 쓴 손 편지 같은 시편들. 낮은 목소리가 전해주는 진심의 온기들.

심재휘 시인의 신작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가 나왔다. 시인은 존재의 비애와 고독을 담담한 문체로 담아낸다. 서울, 런던, 강릉을 각각 배경으로 해 3부로 구성된 시집은 쓸쓸한 일상과 그리운 고향의 바다를 차분히 그려낸다. 창비시선 468권. 9천원.

시에는 삶에 대한 연민의 정서와 적멸에 가까운 외로움이 담겨 있다. 시인은 서울과 런던, 그리고 고향인 강릉을 오가며 소멸해가는 풍경들의 자취를 더듬어가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그래, 마중이구나. 마중하러 나온 거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지상에는 없는, 가만히 눈을 감아야 열리는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이구나. 이 기다림은 떠나온 옛집이 잘 있는지 안부를 묻는 일이고, 빗소리는 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죽 속에는 죽을 만드는 어떤 손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구나. 옥상에서 비 맞으며 담배 피우는 사람을 눈에 담는 유정한 일이구나. 매번 식어만 가는 차일지라도 당신을 위해 차를 우려 ‘가슴 선반’에 올리는 일,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그런 일이구나.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줄 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높은 봄 버스」 부분

버스는 서둘러 온 저물녘을 막 지나고

보조기를 밀며 때가 낀 벽돌의 교회로 들어가는

노인과 그의 늙은 아내를 지나쳐 오면

두부를 넣은 찌개가 식탁에 오릅니다

침대가 너른 제국에도 밤이 옵니다

그리고 이곳은

외로움부 장관이 임명되는 당신의 나라입니다

열두 색 색종이들을 차례로 오리는 듯이

꿈을 꾸는 밤이 옵니다

―「런던의 제국의 수도」 부분

이제 낡고 지저분해진 나의 쓸쓸함은 방랑을 탕진하고 갈 데도 없어졌지만 남대천 모래톱 그 따뜻한 돌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는 없을 거예요 가는 비조차 피할 도리가 없는 정처란 그런 거예요 내가 돌볼 수밖에 없는 그저 쓸쓸한 쓸쓸함이 된 거죠 서울은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돌집은 사라졌어도 우리 손잡고 바다를 볼 수는 있잖아요

―「쓸쓸함과의 우정」 부분

동의대 교수인 전동균 시인은 추천의 글에서 “서울과 런던, 그의 고향인 강릉을 잇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처연한 기억의 발자국만이 아니라, 낯익은 세상의 틈새에서 낯설게 비쳐오는 사람과 마음의 풍경이다”며 “그 사람과 풍경이 지워진 뒤에, 물이 물길을 따라가듯 흘러가는 말이 사라진 뒤에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잔상, 조용히 오래 스며드는 울림이다”고 말했다.

심재휘 시인은 1963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1997년 『작가세계』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등이 있다. 현대시동인상, 발견문학상, 김종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phaki5568@munh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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