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사람 시인선 56으로 나온 시인 김명기의 세 번째 시집 표지)

[문학뉴스=백승 기자] 시인 김명기에게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직진금지」)이란 고백처럼 정확한 문장도 없을 것이다. 이삼십 대를 오호츠크나 홋카이도를 떠돌며 고기 떼와 싸우던 시절도, “북평 장날”이라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체 게바라”를 꿈꾸며 돌진하던 격랑의 시절도 마감한 채, 이제 그는 “밭에다 자꾸 꽃만 심는” “어마이” 곁으로 귀환했다. 태백산맥 오지의 마가리에 홀로 남은 노모를 위해 올 수밖에 없었다. 시인 박승민의 지적이다. 두 번째 시집 제목인 <종점식당>이 타의에 의한 기착이었다면, 이번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는 시인 김명기의 어떤 ‘종점’이 새로운 ‘목적지’로 이동하는 출발지 같다.

걷는사람 시인선 56권으로 나온 이번 시집은 ‘밥과 시’ 사이에 시인 자신을 오롯하게 드러내고 받아쓴 사랑의 기록이다. 그 사랑의 아픈 여정을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만 원.

고백은 힘이 세다. 시집 전반에 걸쳐 속울음을 품고 있어서 어두운 빛깔을 띄고 있으나 쓸쓸하지만은 않다. 고백의 힘은 시인의 선하고 지극한 사랑이 시어의 능동성과 어우러져 묵직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시 ‘시인’과 ‘직진 금지’전문을 보자.

앞집 할매가 차에서 내리는 나를 잡고 묻는다

사람들이 니보고 시인 시인 카던데

그게 뭐라

그게……

그냥 실없는 짓 하는 사람이래요

그래!

니가 그래 실없나

하기사 동네 고예이 다 거다 멕이고

집 나온 개도 거다 멕이고

있는 땅도 무단이 놀리고

그카마 밭에다 자꾸 꽃만 심는

느 어마이도 시인이라……

참, 오랫동안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시인」 전문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무 오래 중심을 잃고 살았다

-「직진금지」 전문

시인은 이처럼 인간이 “거두지 못해 넘쳐 버린 슬픈 연민을” 새나 산짐승 등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대신 “곡비”하고 있는(「부역사건 혐의자 희생 지역」) ‘대속代贖의 밤’에 주목하면서, 아버지와 “서로 다른 곳을 쳐다”(「직진금지」)보던 불화를 “눈과 코가 닮은 아버지를 입관할 때/등을 돌린 채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닮은 꼴」)라는 화해의 고해성사로 차분히 돌려놓는다.

시인 김명기의 장대한 기골의 내벽은 “가끔 성모송을 암송”(「몸살 앓는 밤」)하는 ‘여린 그’로 마감되어 있다. 이때문에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강변여관」)라는 저녁의 독백이 가능하고, “이승의 한 귀퉁이를 껴안은 채/간신히 늙어 가는 사내”(「청량리」)로 저물면서도 “병든 몸이 떠나고 아픈 몸이 들”(「아랫집」)어오는 ‘낡은 집’을 자신의 몸인 양 옮겨 오는 ‘覺’에 이른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유기견에 대한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큰 슬픔 작은 슬픔/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유기동물 보호소」)라는 ‘슬픔의 동시다발성’의 발견이야말로 칸막이 쳐진 우리 삶에 얼마나 소중한 경각警覺인가.

이처럼 이번 시집은 자기를 발원지 삼아 세상 밖으로 서서히 붉게 번져 나가는 일몰의 ‘쓸쓸함’을 보여 주되, 그 ‘쓸쓸함’이 덤덤한 일상에 대한 반성의 ‘깨달음’으로 ‘자주’ 전환된다는 점에서 ‘맑은 쓸쓸함’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같은 쓸쓸함은 다음의 시 ‘강변여관’에서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고

흐르는 물결 속으로 달빛이 스민다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는 일 같지만

오랜 생을 나눠 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

가만히 덮어 준다 경계를 지우며 살 섞는 시간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쓸쓸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허물 대신 온기 없는 낡은 침대와

살을 섞으며 시든 불화의 목록에서

견디지 못해 그어 버린 경계를

그렇게나마 지워 보는 것이다

-「강변여관」 전문

시인 김명기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2005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와 『종점식당』, 맛 칼럼집 『울진의 맛 세상과 만나다』를 냈으며,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다.

phaki5568@munh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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