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장마리의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표지)

[문학뉴스=백승 기자] 극동을 지나 중앙 시베리아로 들어갈수록 백야로 해가 졌어도 세상이 희뿌옇게 흐려질 뿐이었다. 저녁과 새벽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홍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루 이십사 시간도 우리하고 다르고 새벽이 저녁 같구, 저녁 이 새벽 같구, 자꾸 낯설어지는구만.”

철길을 따라 늘어선 자작나무 잎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빛에 반사된 물결처럼 반짝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자르르 자갈 굴러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소설가 장마리의 <시베리아의 이방인들>에 나오는 구절이다. ‘빛에 반사된 물결처럼 반짝’거리고, ‘귀를 기울이면 자르르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듯 철길을 따라 늘어선 자작나무 이파리들의 묘사는 간결하면서도 작가의 호흡과 체온이 스며 있는 문장들로 아름답다. 문학사상사 간. 1만4500원.

아름답지만 실패한 젊은이들의 눈부신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삶의 현실을 부둥켜안고 고뇌하는 인간들을 통해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이 시대의 문제를 박진감 넘치게 풀어나간 수작이다. 또 한편으로는 냉혹한 현실에 패배하지만 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송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자.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준호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에 귀국한다. 얼결에 대성제재소의 대표 자리에 앉지만 준호는 십 년이나 한국을 떠나 있었기에 국내 시장을 잘 알지 못한다. 그는 한국의 소나무와 종자가 같아 대목장도 구별하기 어렵다는 시베리아의 소나무를 들여오는 것만이 대성제재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고 시베리아로 떠난다.

“지식인이라면 체제에 문제 제기하는 거, 이 아바지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남들은 다 옳다고 해도 옳지 않은 거를 발견했다믄, 다시 들여다보는 눈과 마음을 지녀야 진짜 지식인이 같지. 너는 인민들의 발밑으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외면하지 말고 살피는 진실한 지식인이 돼라. 기카지만 애미나이한테 빠져서 조국과 가족을 배신하려는 행위만은 결코 용서할 수 읎어! 알간?”(89 p)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경리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할아버지 사무실의 오른편에만 머물렀다. 위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나무판자 미닫이가 구분해주는 공간이었다. 미닫이는 열 때마다 찌그덕 소리가 났다. 마치 흑백영화 속 학교 교실 문처럼 낡아 있었다. 아버지는 양팔에 토시를 끼고 장부 정리를 하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낮은 목소리로 대성제재소입니다, 라고 전화를 받았다. 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듬직한 어깨가 굽고 뿔테안경이 은테로 바뀐 모습으로, 당신의 자리는 그 자리라고 여기며 언제나 그 공간으로 스며들어 갔다.(97p)

니체는 망각을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했다. 지난 칠 개월의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 잊히지 않을 기억이기 때문일까. 지금 잘 견디고 있는가? 아니 잘 버티고 있는가? 지석은 감기와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었다.(183 p)

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서울대 국어국문학과)는 “<시베리아의 이방인들>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생각하도록 하는 근래 보기 힘든 문제작이며 스케일 작은 ‘문단적 소설들’에 지쳐 있는 독자로 하여금 눈 크게 뜨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시원스러운 작품이다”며 “한국문학은 이렇게도 자신의 살과 뼈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고 평가했다.

손홍규 (소설가) 도 “장마리 작가가 되살려낸 벌목장의 풍경은 근사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여서 현실 너머의 또 다른 세계인 것만 같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사나운 시베리아의 밀림으로 모여든 젊은이들. 그들은 운명처럼 실패하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운 우정이 태어난다.”라며 이 우정이야말로 “아름답지만 실패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서늘한 진실 앞에서 오래도록 눈이 부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마리 작가는 196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단편소설 〈불어라 봄바람〉으로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선셋 블루스》와 테마소설집 《두 번 결혼할 법》 《마지막 식사》, 장편소설 《블라인드》 등을 펴냈으며 제7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2019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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