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의 종횡무진]

(김미옥 활자중독자)

시가 밥이 되지 못하고

얼마 전 내게 온 시집이 송태웅의 『새로운 인생』이었다.

나는 서가에서 동일제목의 책을 찾아냈다.

『새로운 인생』은 단테가 젊은 시절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에게 바친 서정시 모음집이다.

단테의 시집이 시작되는 삶에 대한 사랑의 찬가일진대

환갑의 시인, 송태웅의 『새로운 인생』은 무엇을 노래하는 것인가.

*

바람이 진꼬리 도마뱀처럼

비닐문을 들치고 들어오나 보다

어둠이 미끈거리며 목덜미를 감쌀 무렵

방안에 웅크렸던 나라는 짐승을 본다

사람 하나였다고 믿었던 나의

껍질을 빈방에 결박해두고

신원미상의 얼굴을 하고선

행자승처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먹고

신발끈을 매고

쫓기는 사람처럼 집을 나선다

나는 당분간 일용노동자로 살기로 했다

내 등을 떠밀어 다오

서투른 몸동작으로

삽과 괭이와 해머와 철사와 커터 들을 다루는 나를

이제야 그들의 눈빛에서

체념과 순응의 본능을 읽을 줄 알게 된 나를

내 어머니에게 이런 나를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인생을 향해

꿀꺽 침을 삼키는 나를

- 「새로운 인생」 전문, 『새로운 인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얘야, 왜 남들처럼 살지 않는 게냐.

젊은 날 보이지 않는 무엇을 찾아 방황하던 시인은 이제 혼자 집속에 있다.

그가 ‘껍질’이라 벗어놓은 건 그의 영혼이었을 것이다.

‘생존’하는 시인이 혼자 밥을 지어먹고 일용노동자로 나선다.

‘정신의 사람’이었을 그가 새로 시작하는 삶은 ‘육체의 사람’이다.

(송태웅 시인, 사진=산지니 출판사 제공)

*

등산로 정비하는 동료 인부들의 점심밥을 가지러 산길을 내려가다가 길을 잃었다 삼거리에서 바위를 끼고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직진을 해버린 것이다 지게까지 짊어지고 온몸에 가시를 달고 있는 잡목 숲을 헤매었다

당신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데 나만 그것을 모르고 미친 듯 당신을 쫓고 있는가

주단 같은 세상의 길 잃고 가시덤불 숲속에 들어선 나는 숲속의 길 잃고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에 들어선 고라니 같았다

길을 잃고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새로운 내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나였다 내가 몰랐던 내가 새로운 나였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워야 천칭의 반대편에 놓인 평안과 적절히 수평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키 큰 소나무들이 지남철처럼 나를 끌어주어 길을 찾았고 점심밥을 찾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부들에게 가져다주었다

- 「길을 잃고 나는」 전문

시인은 자신을 ‘숲속의 길 잃고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에 들어선 고라니’ 같다고 한다.

세상과 시인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시가 밥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밥이 시가 되고 있다.

이 시집엔 고라니의 여러 모습과 밥을 혼자 지어먹는 풍경이 자주 나온다.

시인은 1961년생, 80학번,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광주 5·18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잘못된 세상에게 내린 그의 처방은 시(詩)였다.

시인의 등을 떠미는 역마살이 여기저기 흔적을 보인다.

담양, 광주, 제주, 순천, 구례 그리고 지리산이 있다.

이 시가 3년 전이었으니 지금은 또 어느 바람이 그를 길 위에 서게 했을까.

방황이 아니라 방랑이다.

이토록 쓸쓸한 바람의 유전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인은 ‘육체의 사람’이 아니다.

먼 옛날에도 시인은 세상과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송태웅, '새로운 인생', 산지니, 2018)

이 시집의 가장 애정하는 시다.

*

냉장고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감자알 하나 꺼내 된장국 끓여 저녁을 먹고 마루에 앉아 초여름이라는 계절 나라는 인간 당신이라는 사람 우리라는 시대에 생각이 끌려가 목이 말랐다

달이 가도록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아 바닥이 드러난 구만 저수지를 지나다 산동의 좁다란 무논에 이제 막 넘어지기 위해 논두렁에 줄지어 선 어린 모들을 보았다 바람에 간절히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 어린 것들에게서 비린내를 맡았다 내 아들 돌 지날 무렵 그 애의 입에서 나던 제 어미의 젖냄새를 바다가 보고 싶어 구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여수에 갔다가 국문과 후배를 만나 술을 마셨다 파도가 밀어닥치는 소리를 듣고 별들이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그 느린 장면을 여수의 어느 주점에 남기고 다시 열차를 타고 구례로 돌아온다는 것이 눈을 떠 보니 전주였다 다시 전주, 임실, 오수, 남원, 곡성, 구례구 우리나라 남반부의 지명들을 새김질하면서 새벽별이 소근거려 올 무렵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앉아우리라는 시대 당신이라는 사람 나라는 인간 비 오지 않는 계절에 생각이 끌려가 어두운 하늘 바라보았다

- 「행각」 전문

“나라는 인간 당신이라는 사람 우리라는 시대”가 다시 “우리라는 시대 당신이라는 사람 나라는 인간”으로 안착한다.

나는 이 시를 읽다가 웃었다.

그는 하루 세 끼를 먹는 육체의 사람보다 한 끼를 먹는 시인일 수밖에 없다.

인생에도 관성이 있어 어느 날은 본질의 나로 돌아가지 않는가.

바람이 어느 곳으로 보내든 시인은 시인이다.

남도에 시인 송태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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