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출판사가 펴낸 원철스님의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표지)

[문학뉴스=백성원 기자] 불교계 대표 문장가로 유명한 원철 스님이 4년 만에 산문집을 펴냈다. 이 산문집은 지난 5년 동안 스님이 직접 국내외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 고증해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60여 개의 뜻깊은 장소와 1백여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른 바 역사문화 기행기라 할 수 있다.

불광출판사에서 나온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1만7,000원)에서 원철 스님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 나라의 의미 있는 지역을 찾아 때로는 반나절의 산책에서, 길게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을 통해, 그 여정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갈무리해 스님 특유의 감성과 문체에 담았다.

이 책에서 저자인 원철스님은 수백 년 넘은 백송을 이야기하면서 고사목 그루터기를 그대로 두고 지은 현대식 건물을 슬쩍 끼워 넣고, 이순신 장군이 전쟁 중에 병사들을 위해 남해 바다에 켠 연등을 광화문 광장으로 불러오고, 사물을 더 잘 보려는 목적보다 오히려 마음을 감추는 역할을 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안경의 매력을 말하는 식이다.

스님의 필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래된 것들의 단순한 의미를 곱씹는 대신, 뜻밖의 시선으로 시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발굴해내기도 한다. 즉 ‘낡아가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세상과 시간은 언제나 새롭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에게 은근하게 일깨우는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나뭇가지 하나로도 충분히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는 작은 새의 삶을 추구한 초의 선사가 만년에 머물렀다는 일지암의 원래 구조는 초당과 누마루 달린 기와집 두 채가 전부였다.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찻집과 운치 있는 살림집인 기와집의 만남이다. 두 집 사이에는 물에 비친 달을 즐기기 위해 작은 연못을 팠다. 얇고 널따란 구들장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초석 위에 굵지 않은 기둥 네 개가 받치고 있는 밋밋한 누마루집이 소박한 초당과 더불어 대비감을 연출했다.

두 건물은 서로 지척에 있지만 물을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경계를 나누지 않는 듯이 나누었다. 그야말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의 긴장감이 오랜 세월 권태로움 없이 서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된 것 아닐까. 그야말로 건축적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인 셈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일지암을 바라보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지혜를 새삼 곱씹었다.(P. 23)

구경 가운데 물 구경이 으뜸이라고 했다. 자연과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인 추사와 존재 선생은 비 오는 날 물소리를 듣기 위해 수성동을 찾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막신을 신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나막신은 평소에 신는 신발이 아니다. ‘비가 오면 짚신 가게 아들이 걱정이고 날씨가 맑으면 나막신 가게 아들이 걱정’이라는 속담에서 보듯,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의 신발은 달랐다. 비 오는 날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집콕’ 했을 것이다. 나막신을 신고 우비를 입고 외출한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매우 큰일인 것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나막신은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두 어른에게 비 온 뒤 물 구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과제였다.(P. 40)

‘산골 판매소’라는 돌 간판이 서 있는 입구에서 시멘트 계단을 밟으며 절벽을 따라 올라가니 낡은 알루미늄 문이 보인다. 동굴형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주인장과 처음 대면했다. 일요일만 쉬고 매일 출근한다고 했다. 약재상 등 단골들이 연락도 없이 드문드문 찾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소문을 듣고 오는 개인도 더러 있다. 예전에는 자주 작업을 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고 한다. 좋은 의료 시설과 치료제가 많기 때문이란다. 채굴이라고 해봐야 필요할 때 광부 한 명을 부르는 수준이다. 사장 1인과 비상근 직원 1인 회사인, 전국에서 가장 작은 광산이기도 하다. (…)

동네 이름의 근거지가 되는 녹반의 생산 판매 시스템이 그대로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개발 시대 이후 표지석만 남기고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심의 많은 문화유산 터를 대할 때마다 느끼던 그동안의 허무감을 달래 주고도 남는다. 덤으로 ‘산골고개’라는 버스 정류장 이름마저 자동 홍보판이 되는 특별한 공공 자산까지 보유한 곳이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더해 준다(P.117~119)

이 책은 서문 형식의 ‘들어가며’ 기대를 머금고 가는 길도 길이요, 헛걸음치고 돌아오는 길도 길이다를 시작으로 모두 3장으로 구성됐으며, 1장 만남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다시 만남을 만든다 2장 길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3장 삶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 와 부록으로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장소)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인물)’을 각각 묶었다.

저자 원철스님은 지은이의 말을 통해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 중국 · 일본 ·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의 의미 있는 곳을 찾았고 묻혀 있는 인물도 깜냥껏 발굴했다. 고전에서 많은 명문을 만났고 선시를 읽으면서 밑줄을 쳤으며 글에 얽힌 갖가지 인문학적 역사까지 더듬을 수 있었다.”며 “오래된 것들에 축적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마스크 생활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잠시나마 숨 쉴 틈이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고 썼다.

한편 원철스님은 지난 1986년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대승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며 번역과 강의를 통해 한문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해왔다. 월간 『해인』 편집장 소임을 맡은 이후 일간지와 여러 종교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을 써왔다. 주요 저서로는 『선림승보전』 등의 번역서와 대한불교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및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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