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의 종횡무진]

(김미옥 활자중독자)

바슐라르와 산책하기

나는 한때 바슐라르 신봉자였다.

국도를 달리다가 카페 이름이 <꿈꿀 권리>여서 급브레이크를 밟은 적도 있다.

주인이 바슐라르를 안다는 것에 친밀감을 느꼈다.

그는 ‘시간의 연속성’을 뒤집어엎은 자였다.

인간의 시간은 비연속적이며 매순간 이성과 상상력으로 세계와 싸우고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詩와 과학이라고 했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 불연속성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내게 부정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책자를 위한 인문 에세이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를 앞에 놓고 있다.

저자의 서명이 든 이 책을 바로 읽지 않은 사유가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제목이 식상했다.

책이란 제목 장사가 아닌가 말이다.

(고두현,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 문학의숲, 2021)

첵을 펼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목차가 바로 가스통 바슐라르, 상상력의 근원인 4원소 <물, 불, 공기, 흙>이었다!

저자 고두현 시인이 비연속적인 시간의 개념을 글로 투사했다.

그것도 흙, 공기, 불, 물로 되짚어 나갔다.

이 수필집은 중년의 남자가 사유와 성찰로 걸은 길 위의 책이다.

‘흙’의 시간, <길에서 만난, 반짝이는 생의 순간>은 이효석의 봉평과 스물 세 살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불러 낸 순천만 안개나무로 시작한다.

나는 ‘강화도,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함민복 시인의 이야기에 오래 머물렀다.

폐가에 살면서 돈이 떨어지면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출판사에 보냈다고 했다.

다리가 생기기 전의 석모도가 나도 그립다.

갈매기가 배와 나란히 속도를 맞추면 세계가 멈추었다.

보문사에 올라 해무를 바라보면 나도 바다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황홀한 죽음을 꿈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공기’의 시간, <음유시인 조르주 무스타키를 만난 날>에서 정약용과 안도 다다오도 불러내고 도스토옙스키와 나쓰메 소세키도 불러낸다.

두 작가의 미완성 유고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명암』 얘기도 흥미를 끌었는데 매년 2월 9일이 한사람은 죽고 한사람은 태어난 날이다.

이 글을 읽다가 2년 전 같은 날 타계한 프랑스 동화작가 토미 웅거러를 생각하고 웃었다.

그의 그림 동화는 골이 좀 아픈데 『세 강도』의 경우 빨간 도끼로 마차를 공격하고 돈을 뺏고훔친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하다 애들을 수시로 납치해서 빨간 망토를 입혀 잘 키운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교훈으로 지인에게 선물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글은 ‘현 책방, 느리게 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영국의 헤이온 와이보다 파리 센 강변에 있는 ‘세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 가보고 싶다.

백 년이 넘은 이 책방은 영문 서적을 취급하는데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T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등 영미권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1951년 조지 휘트먼이 이어받아 현재의 자리에 정착했고 지금은 딸이 서점을 물려받았다.

이 책방은 가난한 문학인들이 일을 거들고 서가 한켠에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영화 ‘비포 선셋’의 주인공들이 여기서 만나는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요즘 코로나19로 이 책방이 임대료를 내지 못해 고전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고두현 시인, 사진=채널예스24 제공)

고두현 시인의 이 책은 시간을 넘나들며 추억의 장소와 인물, 역사를 불러낸다.

독자와 저자의 추억이 교차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물’의 시간, <혼자 여행할 때 새우를 먹지 말라>에서 먹자판이 벌어진다.

사랑도 절망도 먹으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책은 입에 쩍쩍 붙는다.

그러나 『냉면꾼은 늘 주방 앞에 앉는다』에는 냉면의 냉자도 안 나온다.

그러니 냉면 맛집은 꿈도 꾸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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