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지형]...이수경 <자연사박물관>

(이수경, <자연사박물관>, 강, 2020)

[문학뉴스=박묘영 객원기자]

"그녀는 똑같은 모양의 백금 결혼반지 두 개를 팔았다. 보석상 주인은 얼마간의 돈을 건네주고 그들의 반지를 서랍 깊숙이 넣었다.

거리로 나왔을 때, 참고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삶의 어떤 순간을 낯선 곳에 버려두고 떠나온 것만 같았다."

- 이수경, '카티클란의 불빛' 중에서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 <인도 야상곡>에는 “죽어가는 별의 질량이 태양보다 두 배 이상 커지면, 그 별은 수축을 저지할 수 있는 물질의 상태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해서 무한대로 수축이 진행되고 그 별에서 방출되는 것도 없고 그렇게 해서 블랙홀로 변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문학동네, 2015)

질량이 두 배로 커지면 수축할 수 없어서 블랙홀로 변한다는 말은 단지 별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존재하는 그 자체의 질량이 슬픔이나 불행의 요소보다 커지면 무한대로 수축이 되어 슬픔이나 불행의 요소만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지 모른다.

어머니의 자살,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 그리고 학대, 공장에서 해고된 남편과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어린 아들까지 소설 속 화자는 마치 불행을 빨아들이는 불행의 블랙홀 같았다.

"그는 아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해나 사랑 따위는, 추운 겨울밤, 먹지 못할 닭똥집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철탑이나 고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의 선택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

- '자연사박물관' 중에서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자연사 박물관>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나머지 6개의 단편은 '자연사 박물관'에 대한 '다시 쓰기'이다.

'다시 쓰기'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텍스트 간의 긴밀한 연결성이 하나의 작품처럼 생각되게 하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각 단편들은 그 속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들을 위해 존재하고 이야기가 반복될 때마다 감정이 더 이입된다.

예를 들어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단편이 한 장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이 그림은 그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피사체와 그 피사체에 따른 이야기들을 좇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소설 속에는 시속 60킬로미터로 운전하면서 겁에 질리는 화자,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동생과 몰래 다락방으로 숨어들어 소리가 날까 봐 라면을 씹지도 못하고 우물우물 녹여먹던 화자, 재이와 함께 베란다에 차오른 물을 퍼내고, 누군가 버려둔 소파를 마음에 들진 않지만 멀쩡하다는 이유로 거실에 두고 잠까지 청하는 화자, 그리고 해고 노동자의 아내로 남루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화자의 이야기들이 '또 다른 나'로 생략되거나 반복된다.

(이수경 작가, 사진=페이스북)

소설가 이수경은 '작가의 말'에서 조세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조세희 선생에게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던 70년대. 이수경은 “내란 제1세대 군인들이 억압 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고, 또 “슬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과 같은 작품이 있었기에 소설가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였을까. 소설 ‘자연사 박물관’에서 크리스마스에 해고노동자 가족이 자연사 박물관으로 가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카티클란‘에서 크리스마스 즈음 윤철과 윤철의 어린 딸 나리와 또 다른 화자인 '나'와 딸 주연, 그리고 태훈이 함께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자연사박물관>의 연작들은 시간과 공간, 가족들의 사는 모습과 이야기는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디에도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마지막 이야기가 이 소설의 슬픈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소설의 첫 문장에 시속 60킬로 미터로 운전하면서 겁에 질렸던 그녀를 책을 읽는 동안 종종 생각했다. 그 연약함으로 거친 현실을 위태롭게 걸어갔을 그녀의 거대한 슬픔도 떠올랐다.

그리고 온 마을이 불빛으로 연결돼 한 집 같이 밝았던 카티클란의 광경처럼 그녀가 매일 밤 새우잠을 자던 주워온 소파 위에도 언젠가는 카티클란의 불빛이 환하게 비쳐들기를 기원해 본다.

"이 파도가 지나가면 또 어떤 세상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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