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 홍윤기 기자] raputa@munhaknews.com=대학로에서 목동으로 문협이 이사를 한 후 두 번째로 찾은 이유는 소설가이자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겸 부이사장으로 있는 이광복 소설가를 만났다. 구수한 충남부여 억양으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 무렵 문협 사무실에서 시작한 대화는 순대국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광복 상임이사는 소설가답게 시종 편한 한 대화를 끌어내 주어 최근 인터뷰 중 가장 좋았다.

절찬리에 판매되는 '술래잡기' '바람잡기' '구름잡기' 시리즈에 대해 듣고 싶다. 시리즈로 엮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3개 작품으로 연재를 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그래서 전작으로 펴냈다. 2012년에 구름 잡기를 출간했고 이 작품으로 펜문학상을 받았다. 주인공이 독립 운동가였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역사의식을 얘기하고 싶었다. 역사서도 많이 읽고 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다.

계백' 이라는 작품서 백제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어떤 작품인가?

2004년에 '불멸의 혼'이라는 걸 썼다. 계백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인데 이것을 2011년에 리바이벌을 했고 '계백'이라는 작품으로 제목을 바꿨다. 그런데 2000년대 초에 불멸의 혼이라는 작품이 나오자마자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책이 절판되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별히 계백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내 고향이 충청남도 부여이고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길이 바로 계백 장군이 황산벌로 출전하던 길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6년간 통학을 하며 그 길을 걸었고 그때마다 한순간도 계백장군을 잊은 적이 없었다. 논산에 계백장군의 묘소가 있는데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분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한다. 소설을 쓸 때 계백장군의 원혼이 나를 도와준 것 같다. 작품의 대한 반응도 좋은 편이었다. 역사에는 가족을 다 죽인 걸로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의 혼을 살리기 위해 소설에서는 계백의 아들을 살려냈다.

요즘 사극과 소설에 종종 픽션이 가미된다.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인데 어떻게 보는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재미를 위해 픽션을 가미하가도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가령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전사한 역사적 사실이나 계백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5천 결사대라고 삼국사기나 고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5만 결사대라고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은 불변이다. 하지만 계백장군이 관창을 사로잡았을 때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아군입장에서는 적군인 관창에게 가혹행위를 할 수도 있지만 계백장군은 충분히 관창을 살려 보낼 수 있는 도량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이런 게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픽션을 가미해도 역사적 기록에 충실해야 한다.

그동안 출간된 많은 작품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79년도 장편 <목신의 마을 >이다. 이 작품도 절판이 되었다. 평화로운 농촌이 산업화에 의해 피폐해져가는 과정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소설의 모티브는 주로 어디에서 얻는가?

상상력을 통해 얻는 게 대부분이지만 지인들의 삶과 과거의 경험에서도 얻을 수 있다. 때론 마치 신의 계시처럼 강렬하게 스파크가 일어나기도 한다.

나와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어휘나 문장이 굳이 어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견해에는 어떤 입장인가?

물론 동의 한다. 소설은 쉽게 읽혀져야 맞다. 때론 작품에서 일부러 지적인 유희를 통해 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자기만 즐기려고 하는 소설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견해다. 요즘 평론을 보면 현학적이고 어려운 어휘들이 많은데 엄격히 말하자면 평론도 문학이다. 소설 문학, 수필 문학, 희곡 문학으로 이해되듯이 평론도 '문학 평론'이 아닌 '평론 문학'이 되어야 바람직하다. 평론이 문학이 되려면 자기 원론을 써야 하는데 주례사나 강단 비평정도로는 부족하다. 또한 비평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켜선 안 된다.

문학의 길을 걷게 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인가?

부여에 출생해서 전형적인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당시에는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한글과 한자를 배웠는데 동네 어르신들께서는 이야기책을 사 오셔서 내게 대신 읽어달라고 하셨고 그때부터 나는 동네에서 책 읽어주는 아이가 되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가난한 집 안 환경 탓에 학교까지 도보로 지금의 10km 정도 거리인 25리 길을 6년간 통학했다. 바로 그 길이 부여에서 황산벌로 나가는 길이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먼 길을 통학하면서 학교를 다니기란 너무 고된 생활이었다. 더 이상 학교에 대한 희망이 없었고 의지가 꺾인 상태였다. 보충수업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서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그때 문학을 통해 여러 삶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희망을 느꼈다. 이것이 큰 동기가 되었다. 74년「신동아」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76년『현대문학」소설 추천으로 등단해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독학으로 소설을 배웠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작법을 익히게 되었다. 하지만 공모전에서 낙선을 한 적도 많았다. 순탄하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

은사님의 기억이 남다르다고 들었다. 어떤 분이셨나.

학력도 변변치 않은 나를 추천해주신 분이 안수길 선생님이다. 작년에는 안수길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맞이해 그동안의 은혜에도 보답하고자 16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집을 출간해드리기도 했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은사님께 다시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문화센터의 소설 창작 반 강의를 나간다고 들었다. 그곳에 오는 수강생들에게 주로 어떤 얘기를 해주는가?

기교보다는 내공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한다. 어느 수강생이 대한문에 대한 글을 써왔는데 5대 궁궐에 대한 문은 빼놓았다. 문을 소재로 쓰려면 다른 문에 대해서도 써야만 그만큼 확장성이 생긴다. 다량의 독서로 내공을 쌓아야한다. 다양한 경험도 필요하다.

상임이사로 부임한 이 후 협회의 주된 사업에 관해 듣고 싶다.

문인협회에서 일상적인 업무가 많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전보다 역동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로 변했다. 지역 문인들을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조만간 '서울문단'이라는 잡지의 창간호가 발행될 예정이다. 또 연말에는 문학축전이 열리는데 얼마 전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서울문학축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금년엔 평생교육원 개원을 준비 중에 있고 기금도 마련되어 있다.

앞으로 집필 계획을 알고 싶다.

현재는 협회 일 때문에 작품 활동은 어렵다. 신작을 위해 모티브를 구상해놓은 게 많다. 임기 후 집필 계획이 있다.

정부나 사회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큰 틀에서 본다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인문학의 한 축으로 문화 예술이 있고 문화 예술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다. 이에 대한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의해주는 사회적 공감대가 생겨나야 비로소 인문학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도서구입을 위해 자기 수입의 2%도 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얼마 전 서점 지도라는 걸 봤는데 그 지도에는 일개 시 군에 서점이 없는 곳도 많았다. 인터넷서점도 좋지만 이것은 단순한 유통에 불과하다. 동네서점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 공간이기도 한 셈이다. 무엇보다 정서정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갈수록 종이 생산은 줄어들고 동네 서점들은 더 힘들어질게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마음이 안타깝다.

끝으로 소설을 쓰려는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소설은 노동에 가까운 행위이다. 시간을 들인 만큼 보여지는 것이다.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인터뷰 후기

인터뷰가 끝나고 사석에서는 한껏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졌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서울로 상경해 영등포에서 홀로 지내면서 온갖 잡일을 해가며 힘들게 생활했던 그때의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는 볼펜에 대해 얘기해주었는데 자신은 절대 비싼 것이나 새것보다는 잉크가 거의 남지 않은 싸구려 볼펜만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자 새것을 잃어버리면 너무 속이 상하고 아쉬울 것 같지만 혹시 거의 다 쓴 펜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상심의 정도는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박하고 여린 마음의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