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윤흥식 기자] 전남 나주 출신의 박선욱(58, 사진) 시인이 네 번째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도서출판b, 1만원)를 펴냈다. 지난 1993년 <세상의 출구> 이후 25년만이다.

박선욱 시인은 과작(寡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세 번째 시집 이후에도 여러 지면을 통해 꾸준히 시를 발표했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펴냈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씩 몸을 담았던 여러 출판사에서 맺은 인연과 쓴 글들이 스무 권이 넘는 저서로 이어졌다.

<날쌘돌이 일지매> 같은 어린이 소설부터 <채광석 평전: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와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 같은 본격 평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유형의 책을 펴내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서는 늘 시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오랜 목마름을 달래는 마음으로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를 펴냈다.

강가에 휘늘어진 수양버들

가느다란 가지 위에서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초록 빛줄기

오늘 비로소 눈부시다

춘분 지나도록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더니

어느 틈에 돋아난 뾰족한 새순

화살처럼 쏘아져 무겁게 드리워진 잿빛 세상

새로운 광채로 날카롭게 쪼개고 있다.

시간의 부스러기 언 강 속으로 흘러갈 때

찬바람에 긴 머리칼 풀어헤치고

밑동이며 줄기 새까맣게 말라가던 수양버들

겨우내 땅속 뿌리 어딘가 우물을 파고

깊은 봄 퍼 올리느라 흘린 땀방울

얼음 녹을 때 가지 끝에 맺혀

새하얀 기지개 켜고 있으니

오늘 비로소 눈부시다

강가에 휘늘어진 수양버들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끝으로

서리서리 역류하는 초록 빛줄기

('회색빛 베어지다' 전문)

표제작을 비롯해 예순두 편의 시를 담고 있는 <회색빛 베어지다>는 5부로 나뉘어져 있다. 시집 전반부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무구(無垢)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서정적 시편들로 채워졌다면, 뒷부분은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저항적 작품들로 꾸려졌다.

시인은 표지에 이렇게 적었다. “실로 25년 만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해묵은 노트를 들여다보다 덮곤 했던 일들을 비로소 마무리 짓는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그러면서 이런 각오를 내비쳤다. “돌이켜보니 낡고 해진 것들을 오래 짊어지고 왔다. 반성하고 반성할 일이다. 내 앞에 놓인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야겠다.”

<회색빛 베어지다>는 비 그친 아침 담장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14p)이나, 라일락 핀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20p)처럼 아름답고 여린 것들에 바치는 헌사(獻辭)이자, 불도저와 굴착기로 금수강산을 유린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86p),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들(81p)을 향한 분노의 격문으로 읽힌다.

시인은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붉디 붉은 사랑”이라고 (‘이 살가운 봄날에’) 선언하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가 하면, 이라크전쟁의 아비규환을 보면서는 “전쟁의 노래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유령 같은 대낮에 평화와 번영이라는 말을 누가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모래바람 부는 사막에서’)며 분노한다.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는 또 억압받고 죽임당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전쟁에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람들(‘고봉산에 다시 피는 꽃’), 미선이 효순이(‘악의 축’), 세월호 희생자들(‘그날’, ‘푸른 꿈’), 4대강 사업으로 죽어가는 강들(‘한반도 대운하 걷어치워라’)을 노래한 시편들이 그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표제작 ‘회색빛 베어지다’에 대해 “연꽃과 연장선상에 있는 수양버들을 그린 이 시에서는 역류, 반란, 혁명정신을 읽을 수 있다”고 평했다.

나해철 시인은 <회색빛 베어지다>가 “존재의 엄숙함, 세상 만물에 대한 지극한 사랑, 삶의 핍진함 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며 “이 시짐을 통해 이 땅을 사랑하는 민족시인이자 신자유 자본주의를 헤쳐 나가는 민중시인으로서 박선욱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시인은 1982년 ≪실천문학≫ 제1회 실천문학 신인 공모에 시 <누이야> 등 네편의 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등이 있고, 어린이를 위한 여러 책들과 채광석 평전, 윤이상 평전 등을 펴냈다.

그는 문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수록 작은 것, 미세한 것들에 눈길이 간다”며 “그런 존재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슬비에 젖는

단단한 조가비

그 속에

내 지나온 반생을 돌돌 말아

집어넣는다

조금도 아깝지 않다

('조가비' 전문)

(사진=남궁은 기자)

hsyoon@munh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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