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권미강 기자]시를 짓는 일도밥 짓는 일과 같아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맛이 나고,읽는 이들도행복하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겨 첫 시집 <세상 모든 사랑은 붉어라>(도서출판 b)를 펴낸 김명지(54) 시인은 독자들에게 건넬 '밥 한 상'을차려내기까지 꽤 시간을 쏟아부었다. 정성 들여 쌀을 씻고 가마솥에 안쳐 불을땐 끝에, 마침내고실고실한 밥 한 상을 차려낸 그녀를 <문학뉴스>가 만났다.

(김명지 시인, 사진=이성봉 기자)

어미가 자식을 위해 밥을 짓듯 공들여 지은 시편들 속에는김 시인이살아온 인생 여정과 현대사의 아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시집 제목도 <세상 모든 사랑은 붉어라>다. 그녀가 붉은 가슴을 안고 살아온 사연은 뭐였을까?

놀랍게도 그녀의 고모는 제주4.3항쟁의 피해자였다. 일제강점기 그녀의 큰아버지는 만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독립군이었고, 고향이 여수였기에 친인척들이 여순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5.18광주민주화항쟁도 겪었다.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녀의 가족은 여수에서 속초로 이주해 살았는데, 거기에서 '전라도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편견과 거부감을 견뎌야 했다. 그녀는 지나온 삶을 서문에 짧은 글로 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서성거렸다./ 누구도 돌봐줄 이 없던 시간을 넘어/ 다 살았겠다 싶던,/ 생명이 남았다면 쉰에 이르자 했었다./ 엄마가 닿지 못한 나이/ 그 나이를 넘어섰다./ 나를 돌보는 데 익숙지 않아/ 누군가를 돌볼 궁리에 바쁘게 살았다./ 조금 느리게/ 천천히 웃고 살 일이다’

그녀가 14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는 44세의 나이로세상을 떴다. 스트레스가 불러온췌장암이 사인이었다.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오래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마음들을 시에 담았다.

엄마라는 소리

멀리 뻘밭을 내려다보며 삼식이 매운탕을 먹는데

열다섯에 엄마를 잃었다는

백송식당 새우 튀기는 아줌마가

허리 굽은 당숙네를

엄마, 엄마 하고 부른다

목이 메어 매운탕 국물을 넘길 수가 없었다

엄마라는 소리를 이렇듯 많이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나도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입술을 오므렸다 가만히 열면

그제야 완성되는

엄마라는 소리

엄마

결혼 뒤에는병든 시부모님을 섬겼다. 10년 동안 견뎌낸 시어머니의 노환, 치매환자였던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6년이나 했다. 덕분에 그녀는 몸에 좋다는 음식을 잘하는 ‘건강손’을 가진 여자가 됐다. 갖가지 식물로 효소를 담글 수 있고, 효소음식점을 차리는 이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는 ‘푸드 컨설턴트’ 일도 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오랫동안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는 큰 선물이었다고. 그래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에게 고맙다고.

김 시인은좋아하는 이들에게 맛난 음식들을 잘해주기로 유명하다. 그저 좋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다. 음식은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고 그것은 곧 ‘사랑’이기에.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음식으로 전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 어머니들이 가족들에게 맛나고 배부른 밥을 해주듯 말이다.

순댓국 한 그릇에 공깃밥 둘

아주 오래전

아이를 놓치고 시장통을 터덜터덜 걷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이천 원짜리 순댓국집에 들어가

사정없이 뿌려진 들깨가루를 걷어내고

비닐포장을 쿡쿡 찌르는 비린내

구부러진 허리를 버린 새우젓을 내려다보며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오랫동안 순댓국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한 달 내내 우기인 허름한 골목 속

우기의 추위를 건너려고

순댓국집 문을 밀었다

탁자 여섯 개

서른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와

순댓국 세 그릇에 공깃밥 일곱 개를 시켰다

망설이며 숟가락을 부딪치는 소리,

오래전 놓쳐버린 내 아이가

탁자 앞에 앉아

저도 공깃밥을 시키고 있었다

순댓국 한 그릇에 공깃밥 둘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서 소설을 쓰려 했지만 자신에게는 시가 와 닿았기에 시인이되었단다. 그녀가 등단한 지 8년 만에 낸 첫 시집 <세상 모든 사랑은 붉어라>는 독자들에게는 찰지고 맛난 고봉밥이지만 그녀에겐 뭉근하게 오랫동안 달인 보약이 될 것이다. 지난해 두 번씩이나 다녀온 바이칼에서 담아온 시편들을 또 한 번 우려낼 힘이 될 테니까. 21일 대학로에서 그녀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아버지, 마트료시카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을 보고 와 잠든 밤 꿈에

마트료시카 뚜껑을 열고 아버지가 걸어 나온다

골 깊은 주름 너머로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인부들이

끌고 가는 명태손수레

목화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날리는 길

엿장수의 등장에

작대기를 흔들며 따르는 아이들

명태꾸러미와 엿을 바꾸려는 때

아버지의 기침이 기척으로 들렸다

여섯 다섯 넷 셋

점점 작아지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다시 마트료시카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 모두 밧줄로 끌고 가는 파도

하얀 겨울 파도

kangmomo@munh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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