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윤흥식 기자] 허만하(86)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솔 출판사, 사진)을 펴냈다. 2013년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이후 5년 만이다.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중에는 "허만하라는시인은 몰라도,그의문장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읽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리석처럼 단단하고 얼음처럼 투명한 그의 시편들은 한국 시단을 구분할 때 도식적으로 적용해오던 ‘서정’이나 ‘참여’ ‘실험’ 같은 카테고리에 가둬지지 않는, 고유하고도 청렬(淸冽: 맑고 차가움)한 시 세계를 보여줬다.

신작시집 <언어 이전의 별빛>에는 예순 일곱 편의 시가 실려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1999년 나온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집 제목을 표제로 삼은 시가 없다는 것.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시의 제목이 아니라 ‘프라하 일기’라는 시의 중간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이 백만 볼트짜리 문장에 ‘감전’된 한 문학평론가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사람들이 몰라보다가 어느날 깨닫게 된)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허만하의 문학이 발굴되었다"라고 평했다.

(허만하 시인)

‘존재’와 ‘언어’는 허만하 시인의 문학 세계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자, 그가 오래도록 천착해온 사색의 주제이다. “시인은 언어가 타고난 근원적인 고난을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집 머리말은, “시는 존재와 언어의 틈을 메우는 것”이라는 그의 평소 시론(詩論)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957년 『문학예술』로 등단한 이후, 반세기 넘게 시작(詩作)을 지속해온 허만하 시인은 고집스러울 만큼 ‘언어’를 천착해가며 언어가 지니는 상투성 너머의 세계를 그려내왔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허 시인은또 “시의 힘은 오로지 고립에 있다. 나를 시인으로 길러준 정신의 변방에 감사한다”고 머리말에 적고있는데, 이는 날로 부박해져 가는 문학풍토 속에서 서울 중심의 문학권력이나 허명(虛名)에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꿋꿋이 부산 문단을 지키고 있는 그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임우기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정신의 변방’은 허만하 시인의 시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관념의 재생, 또는 반복이 아니라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정신의 변방’에서만 가능하다. 변방은 ‘중앙’에서 찾아지지 않는‘새로운 것’, ‘날것’의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난 허 시인은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1957년 『문학예술』지의 시 추천으로 등단했다.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청마 풍경> <시의 근원을 찾아서> <야생의 꽃> <살구 칵테일>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순진한 짓>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청마문학상, 목월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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