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는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겨낸다. 요절시인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 그렇다. 1989년 시인이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그는 문단의 신성(新星)이었다. 별이 중천에 떠오르지도 못하고 스러지자 문단은 탄식했다. 그로부터 28년. 유고시집은 여든 번 넘게 쇄(刷)를 갈았다. 시의 불모지에서 30만 권 가까운 시집이 팔렸다. 별은 전설이 되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전설을 탐색했다. 그 가운데 깊이와 밀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는 임우기(61) 문학평론가다. 그는 문학과지성 편집장 시절 기형도의 유고시들을 직접 추리고 묶었다. 기형도의 시비를 세우거나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이들이 그를 찾아왔다.

최근 문을 연 기형도문학관이 임 평론가에게 특강을 요청했다. 지난 2009년 '구름의 관음(觀音)' 이후 두 번째 기형도론이 완성됐다. 200자 원고지 130장이 넘는 묵직한 글이다. 기형도의 이미지가 젊은 층 사이에서 팬시 상품처럼 가볍게 소비되는 현실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노작(勞作). 문학뉴스가 임 평론가와 기형도문학관의 동의를 얻어 강연 요지를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강연은 24일(금) 오후 2시 30분 광명시 기형도문학관. 평론 전문은 다음 달 발행되는 계간 <문학의 오늘>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기형도 시의유기체적 자아(1)

임우기(문학평론가)

(임우기 평론가, 사진=남궁은 기자)

기형도 시의 시적 자아와 유기체적 자아

시인은 시를 낳을 때 자신 안에 활동하는 시적 자아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시인 안에서 시심이 발동할 때 시적 자아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다. 어렴풋이 느낀다는 것은 시적 자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명확히 의식하지 못하는, 곧 시적 자아는 평소 무의식 속에서 잠재성으로 있음을 말한다. 시인의 고유한 시적 자아란 시적 자아를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서 자아에게로 부르고 다가오도록 하는 것이다. 시적 자아가 지금-여기의 시적 존재로서 각성된다는 것은, 시적 자아를 시인 자신에게 시적 존재로 부름 속에서 ‘이름’을 뜻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부르듯이, 시인의 자기 시적 존재의 부름에 시적 존재의 이름(혹은 닥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南新義州柳洞朴氏逢方」)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같은 시편들에서 시적 자아 속에 더불어 무당적(巫堂的) 자아가, 혹은 김수영 시에서 현실참여적 자아 속에 더불어 있는 유력한 시적 자아로서 ‘반어적(反語的) 존재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듯이, 기형도 시의 시적 자아 속에 유기체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적 자아의 그늘 혹은 그림자가 더불어 존재한다. 백석 시의 무당적 자아와 유기체적 자아는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 자아들의 존재는 소위 합리적 이성적 자아와는 거리가 먼 초이성적 초월적 자아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9일 일산소재 '이듬책방'에서 기형도의 문학세계를 주제로 강연중인 임우기평론가. 사진 =박정민 기자)

기형도의 시적 자아 안에서 함께하는 가장 인상적이고 유력한 자아는 유기체적 자아이다. 기형도 시에 잠재하는 유기체적 자아는 시인 기형도 시에서 “[시적 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올 수 있고 이러한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도 다가오도록 함에서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견지하기 때문에,” 실존적인 시적 자아이다. 따라서 기형도 시 속의 그늘로서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 가능성은 시적 존재의 “탁월한 가능성을 견지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도 다가오도록 함은 도래[미래]의 근원적 현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적 자아의 그림자로서 유기체적 자아는 시의 부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시의 존재 가능성이다. 시 속에 드리운 자기 모순과 아이러니가 시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에서의 그늘 혹은 그림자는 시의 존재 가능성, 즉 시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은폐된 존재이다. 시에서의 감추어진 그늘 혹은 그림자는 시적 존재로서 ‘불러들임’으로써 시의 눈[詩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늘의 존재는 이성적 주체의 의식 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조차 즉 시의 어두운 이면에서 아이러니 형식으로 존재한다. 시적 존재는 거의 무의식적이거나 반半의식적으로 고유한 초월적 시간성 속에서 비로소 실존으로 ‘불러 맞이함’을 경험하게 된다. 미세한 이질성 혹은 뜻밖의 돌발성 같은 시의 그늘이 시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미맥락에 흠을 내어 변질시키고 반역하기도 하며 시의 의미가 지닌 물리적 합리적 시간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중략)

기형도 시는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가 겪는 가난 불안 공포 죽음 등의 고통을 내면화한다. 하지만, 기형도의 시의 의미심장함은 우선 필연적 죽음의 존재로서 본래적 걱정을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존재 가능성으로 자각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죽음의 본래적 걱정이나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진 인간의 불안 공포 죽음은 기형도 시의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구성요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은 시적 자아의 ‘그림자’에 의해 시적 존재 가능성으로 새로운 지평을 품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적 존재의 지평을 여는 자아의 그림자는 무엇보다 새로운 시간성이 내재된 자아이다.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르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나리 나리 개나리」 전문(강조 필자)

소문에 의하면, 시 「나리 나리 개나리」는 실제로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죽은 시인의 기형도의 누이를 향한 그리움과 애절한 슬픔, 절망감을 시적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라 한다. 시에 드러난 줄거리를 파악해도 누이의 불행한 죽음을 다룬 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이의 뜻밖의 죽음으로 시인이 겪은 참담함과 절망감 그리고 그리움의 깊은 고통이 이 시의 안팎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이 시는 시인이 가족사적으로 겪은 참혹함이나 절절함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형도 시의 시적 자아의 내밀한 성질과 그 특유의 비극적 세계관의 내면적 진실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길잡이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기형도 시인의 특징적 시 의식이 엿보이는 데, 그것은 무엇보다 시의 소재가 된 ‘누이의 죽음’이 시간성時間性과의 관계 속에서 그 시적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주목할 점은, 시인은 누이의 죽음을 가져 온 비극적 사건 혹은 구체적 사태를 드러내지 않고, 누이의 죽음을 궁극적인 존재 가능성의 지평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죽음을 ‘궁극적 존재 가능성’으로서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현존재로서의 시간성의 자각이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의 ‘시간’은 존재물Seinde에서 존재Sein로의 실존적 해방을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존재론적 조건이다.

(사진=기형도문학관 제공)

‘존재는 시간이다’ 라는 존재론적 명제는 이 시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특히 2연에서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라는 시구는 죽음조차 “시간의 얽힌 영토 속에서” 내던져진 존재의 사태로서 이해된다. 시인은 누이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시간’이라는 삶의 근원성이면서 ‘궁극적 존재 가능성’으로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그 자체로 궁극적 존재 가능성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누이의 불행한 죽음조차 ‘궁극적 존재 가능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같은 시구에서 엿보이듯이, 시적 자아의 생사고락을 넘어선 자기 초월적 고백이 이어질 수 있고, 마침내는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라고 하여, 자연과의 하나를 이룬 시적 자아 곧 세계내의 역사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기체적 존재성을 각성하게되고 이를 거리낌 없이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형도 시 전반에 드러나는 시적 자아의 존재와 시적 자아의 ‘그림자’로서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기형도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의 서문序文으로 쓰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 11)(강조 필자)

시인 기형도는 수많은 상투적인 그래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자연의 비유’들, ‘인간주의’의 울타리에 갇힌 ‘자연의 비유’들을 철저히 거부한다. 시인은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라고 실토한다. 이 고백을 액면대로 이해하여,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기 위해 비극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속계의 비유로서 ‘거리의 상상력’을 택했다는 표면적 의미 해석에 마냥 머무를 수는 없다.

이 기형도 시집의 서문은, 적어도 ‘자연의 비유’와 ‘거리의 상상력’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읽혀야 기형도 시의 주제의식과 일치한다. 그렇게 해석될 때, 위 시 「나리 나리 개나리」에서 누이의 불의의 죽음과 고통이 시적 자아의 존재론과 자연의 초월적 시간성 속에서 비로소 순화될 수 있다. 그리하여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강조 필자)라는 시적 자아의 시적 정언定言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론적 시간성과 진실한 자연성의 절실하고 절박한 자각에 따른 시적 정언이다.

(사진= 기형도무학관 제공)

이처럼 불안 공포 비극 죽음 속에서 걱정하는 존재는 불안한 상황 속 존재임을 각성하고 실존하는 자아를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기형도 시의 독특하고 고유한 형식성이라 할 자연과 서로 깊이 하나가 된 유기체적 자아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때 시적 자아는 주체의 형식이 아니라, 실존의 형식으로서 유기체적 존재를 자신의 그림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인용한 시 「나리 나리 개나리」가 지닌 심연의 의미는, 시적 자아가 죽음은 생명과정으로서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자각하고 죽음이라는 궁극적 존재 가능성을 ‘불러들임’으로써 죽음의 존재 지평에서 ‘유기체적 자아’를 자각하였고 이것을 자기 고유한 존재성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기형도의 시적 존재의 고유한 전형典型이거나 특징을 드러내어준다고 말할 수 있다.

(11월 22일에 2회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