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윤하원 기자]

조정권 시인이 8일 오전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

고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와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69년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작은 시 ‘흑판’.

1987년부터 1991년까지 30편의 연작시 <산정묘지>를 발표해 '정신주의 '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 시편들은 당대의 평론가들로부터 "동양적 정관(靜觀)과 노장적·불교적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담아냄으로써 정신주의 시의 정점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영민 문학평론가는 고인의 시 세계에 대해 “맑고 순수한 감성이야말로 조정권 시의 본질이다. 순연한 감성과 강철같은 의지력은 그의 시가 부단히 변모할 수 있는 강건함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고인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으로 대표된 1970~1980년대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직관에 의해 시를 쓰면서, 현실의 세계보다 초월의 세계를 그렸다.

문단 안에서도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조용히 사색하고 관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건축·무용·음악·미술 등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문화예술지 <공간> 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근무했다. 투병생활에 들어가기 전까지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해왔다.

김수영문학상(1987), 소월시문학상(1992), 현대시문학상(1994), 목월문학상(2011) 등을 수상했고, 주요시집으로 <시편>(1982), <허심송>(1985), <하늘이불>(1987), <바람과 파도>(1988), <얼음들의 거주지>(1991), <산정묘지>(1991) <신성한 숲>(1994), <떠도는 몸들>(2005), <고요로의 초대>(2011)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山頂墓地 1’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매혈자들

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지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靈泉(영천)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